[문화] 깃발 색깔은 달라져도, 혁명들이 가까이 맴돌았다 [왕겅우 회고록-청년기(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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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이후 줄지어 일어난 사건들 속에서 싱가포르의 이탈이 내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차분히 음미하기 어려웠다. 내 나라로 받아들인 말라야에 싱가포르가 포함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분리 독립에 이르는 과정을 보며 식민지 이후 국가 건설 과업에 내재된 근본적 모순을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내가 코스모폴리턴의 길로 끌리지 않고 국가 속의 안정감을 원한 것은 나 자신만이 아니라 내 가족을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학문과 진실의 이념에 입각한 근대적 대학에서 일하는 것이 소속감을 지키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길이 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 길의 실행을 위해 필요한 책임을 다하려는 각오가 있었다.
1965년에 일어난 몇 개 사건을 통해 나는 불확실성이 늘어나는 세상에 극도로 민감하게 되었다. 싱가포르는 냉전의 열전화 과정에서 하나의 작은 부분일 뿐이었다. 인도네시아의 참혹한 사태와 베트남의 확전이 가까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네루 사후 인도의 권력투쟁과 중-소 관계의 파탄도 그리 먼 곳의 일이 아니었다. 중국은 공산당 내의 분열이 일어나 나라를 통째로 뒤집어엎을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캔버라에서 돌아온 후의 몇 달이 내 평생을 통해 가장 걱정이 많던 시기였다.
〈건국 방략〉 작업 후 나는 우리 교과서에 19세기 영국인 활동에 관한 내용이 너무 많고 말레이 국가들의 역사가 소홀하다는 문제를 생각했다. 〈말레이연대기(Sejarah Melayu)〉 등 문헌에 나타난 초기 역사에 비중을 더 둘 필요가 있었다. “국사” 연구 진흥의 필요에 동료들도 동의했다. 동남아시아사의 맥락에서 역사를 강의할 방안을 교수회의에서 논의했다.
학생들에게 말레이시아 역사의식을 높여주기 위해 강의에 현지답사를 넣는 방안도 생각했다. 영국인이 오기 전의 19세기 페락을 학생들이 그려볼 수 있는 답사를 준비하고 자이날 아비딘 와히드와 쿠케이킴에게 자료집 만들 것을 부탁했다.
답사의 성과가 좋아서 이듬해에도 다시 답사를 실행했다. 이번에는 페락 서북부의 라룻과 마탕이었다. 세페탕 강 늪지대의 중국인 정착지를 둘러보는 데 지역 경찰의 호위를 받았다. 밀무역자와 비밀결사가 오랫동안 활용한 곳이며 지금도 우범지대로 주의를 끄는 곳이었다. 학생들은 백년 전 라룻에서 생산되어 페낭으로 수송되는 주석을 둘러싼 암투에서 이 비밀스러운 중국인 마을들이 맡았던 역할을 마음속에 그리며 매혹에 빠져들었다.
학과를 위해 한 일이 또 하나 있다. 1964년 홍콩대학 학회에 참석했는데, 역사학계의 두 개 흐름을 합치는 자리였다. 그 하나는 마닐라에서 창설된 아시아역사국제협회(IAHA)였고 또 하나는 같은 해 싱가포르에서 열린 동남아시아사학회였다. 동남아시아사학회가 1964년의 홍콩 모임에 IAHA도 함께할 것을 제안한 후 두 모임의 통합이 합의되었고 나는 IAHA 회장직을 맡아 1967년 쿠알라룸푸르(KL)의 제4차 회의를 주관하게 되었다. 학교에 돌아와 소식을 전하니 모두 기뻐하고 우리 첫 국제회의의 준비를 시작했다.
캔버라에서 돌아온 후 동양학대회 1967년 회의를 미국에서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럽 밖에서는 처음이었다. IAHA 회의를 1967년에 연다면 양쪽 모두 참여하기 어려운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이듬해로 바꾸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조직위원회가 연기를 승인했다.
나는 중국계 말라야인의 역사를 말라야 국가사 속에 얽어넣는 방향이 역사학의 장래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종족을 바탕으로 한 이념투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가능한 일일지 자신감이 흔들리고 있었다. 말라야중국인협회(MCA)에 관해 더 알게 되면서 종족 기반 정당에 반감이 일어났다. K.J. 라트남의 〈말라야의 종족주의와 정치 과정〉(1965)을 읽으며 민주국가 건설의 첫 단계에서 세 개 종족집단이 정치를 지배하는 길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그의 전망에 공감했다. 그러나 종족 결집력이 고착되어 정치인들이 대중의 지지를 끌어모으는 유일한 길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 중국인의 정치적 분열을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지역에서 말라야로 이주한 중국인들의 배경과 연결해 보려고 해봤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중국인사회를 조직하려 한 여러 시도를 더듬어보며 말라야 중국인사회의 정치패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남아시아 모든 곳의 “남양 화교”를 단 하나의 범주로 보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고 라디오강연에서 주장했다. 중국인의 모습은 나라마다 크게 다르다.
중국인이 비정치적이거나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는 그림은 잘못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 그림은 유럽과 아메리카의 민주주의와 정당정치 이념을 기준으로 그려진 것이었다. 중국인이 지역 군주-권력층과의 관계에서 정치적 촉각을 작동시키는 사회적-공동체적 위력이 이 그림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광산업자와 농장주, 소비상품의 생산업자와 유통업자들이 주도하는 말라야중국인협회에서 이 문제가 분명하다. 노동자의 권리와 관계된 활동도 있으나 전통적 정체성에 늘 중점이 놓인다. 1967년 앤아버의 동양학대회에서 말라야의 교육정책과 중국인사회의 정치적 셩격에 관한 고찰 내용을 발표했으나 중국의 문화혁명에 대한 압도적 관심에 파묻혀버렸다.
말라야 국가사에서 중국인의 역할을 파악하려 애쓰면서 중국인 조직들의 기원을 살펴보게 되었다. 서로 다른 세 그룹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한쪽에는 중국만 바라보는 소수가 있었다. 반대쪽에는 말라야 민족의 형성에 참여해 그에 동화하려 하는 또 다른 소수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있는 대다수 중국인은 이 나라에 자리 잡고 국가에 협조하면서 중국인의 문화적 가치를 지키는 것을 최선의 길로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첫째 그룹을 친중, 친공, 또는 애국 중국인으로, 반대쪽 그룹을 이상주의 내지 순진한 신민족주의자나 탈-종족 협력자로, 그리고 중간의 다수를 전통주의, 기회주의, 또는 문화적 쇼비니스트로 딱지 붙이는 것이 손쉽고 그럴싸한 분류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볼수록 그런 딱지가 현실의 이해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룹들 사이에 경계선을 그리고 애매한 회색지대를 줄이려 여러 해 동안 노력했다. 결국 그 노력을 포기하고 1970년 “말라야의 중국인 정치” 논문을 발표할 때는 선명한 깃발을 모두 없애버렸다. 그 무렵에는 내가 국가사 서술에 진실로 공헌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있었다. 나는 그저 한 학자로서, 교수로서, 연구하고 가르칠 수 있기만을 바랐다.
Revolutions / 거듭되는 혁명
이포의 소년시절 이래 나는 혁명의 그림자에서 멀리 벗어나 본 일이 없다. 중국인 점포만이 아니라 많은 가정에도 청천백일기와 국민당기 두 깃발 아래 쑨원 초상이 걸려있었다. 매년 쌍십절에는 신해혁명 기념행사가 열렸다. 1947년 난징에서 아버지는 나를 쑨원 묘소에 데려가 “혁명의 아버지”가 어떤 존경을 받는지 보여주었다. 그러나 대학 친구들은 쑨원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국민당 혁명은 부패와 무능의 표상이 되었고, 향촌에서 진행되는 사회혁명이 나라를 부패에서 건져내는 더 깨끗하고 더 확실한 혁명으로 보였다.
부모님은 마오쩌둥 일당의 혁명이 중국에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런데 말라야에는 더 혁명이 없을 것이라는 그분들 생각도 틀렸다. 대학에서 우리는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혁명을 이야기하고 혁명가로서 아웅산의 역할을 토론했다. 옛날의 혁명도 궁금해서 국왕을 처형한 영국과 프랑스의 혁명에 관해 읽어보았고, 프랑스혁명이 “자기 새끼들을 잡아먹는”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끔찍한 마음으로 읽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중국혁명과 러시아혁명이 있었다. 전국을 할거하는 군벌들에게 국민당이 밀려날 때 젊은 당원들은 러시아 모델을 바라보았다.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 앞에 국민당 내의 불화가 드러났다. 신해혁명의 후계자들이 미국의 군사원조에 매달리게 된 데 청년들은 실망했다.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놀라운 일이었다. 중국은 또 한 차례 혁명을 맞고 있었다.
반-식민주의를 논하던 친구들은 영령 인도의 분할에 따른 종족 대결을 보았고 팔레스타인과 키프로스의 운명을 보았다. 새 말라야연방은 종족 간 대립이 일어나기 쉬운 조건이었다. 멀지 않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상황에서도 배울 것이 많았다. 폭력에는 미래가 없음을 알아본 나는 연방 정치지도자들이 취한 협상의 길을 지지하고 혁명의 생각을 마음에서 지웠다.
그래도 혁명은 가까이 맴돌았다. 호치민은 자본주의 서방에 대한 러시아와 중국의 적개심에 계속 의지했다. 혁명의 깃발 색깔은 달라져도 그 구호는 우리 귓전을 끝없이 맴돌았다. 1965년 말까지 인도네시아는 대오에서 벗어났으나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은 최고조에 달했고 중국공산당은 내부붕괴를 시작했다. 영구혁명을 표방한 “인민 권력”의 괴이한 분출 앞에 구식 혁명가들은 등을 돌렸다.
이 새로운 종류의 혁명이 우리 지역에 가져올 변화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1966년은 당혹스러운 한 해가 되었다. 중국의 모든 출판물이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금지되면서 상황을 파악할 길이 막혀버렸다. 학과 운영에 바쁜 나는 혁명의 열정이 모습을 바꾸는 불안한 상황을 살펴볼 겨를이 없이 눈에 닿는 뉴스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어떤 혁명이 성공하고 어떤 혁명이 실패하는지 궁금한 마음이 일어났다. 민주적 선거제도에 참여하는 길을 택한 인도네시아공산당이 그토록 철저히 박멸된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모든 공산당은 중국공산당을 따라 무장투쟁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민주적 선거 참여를 계속하고 있는 인도와 일본의 공산당에 관한 기사를 써달라는 부탁이 홍콩의 〈아시아 매거진〉에서 왔을 때 흥미를 느꼈다. 사이공에도 들러서 베트콩이 내세우는 혁명에 대한 그 지역 중국인의 태도도 살펴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사이공을 포함한 여행 일정을 짜주었다.
델리에 먼저 가서 로밀라 타파르를 찾아가 그 동생 로메시를 소개받았다. 〈세미나〉 잡지의 창간 편집자인 로메시는 CPI(M) 당원이었다. 1962년 중-소 분쟁과 중-인 전쟁 무렵 인도공산당(CPI)의 분열이 시작되어 CPI(M)은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과 같은 편을 택했다. 로메시에게 누구를 만나면 좋을지 의견을 청했다. 그는 인도 여러 지방 공산주의운동의 조감도를 그려주면서 케랄라에 가서 CPI(M) 지도자 EMS 남부디리파드를 만나고 마드라스(첸나이)에 가서 CPI 지도자 모한 쿠마라망갈람을 만나 서로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권했다.
남부디리파드는 체포되어 만날 수 없었고, 마드라스에서는 다행히 쿠마라망갈람의 집으로 초대받았다. 이튼과 케임브리지 출신으로 1930년대 “케임브리지 공산주의자”의 하나였다. 소련을 지지하는 입장을 거침없이 피력하면서도 CPI의 분열을 아쉬워했다. 마오쩌둥은 마르크스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혁명관은 사실상 중국의 농민반란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쿠마라망갈람의 냉철한 역사 분석을 들으며 공산혁명을 모든 사회의 불가피한 경로로 여기던 영국 마르크시스트들이 생각났다. CPI에게는 인도네시아공산당 같은 운명에 빠질 위험이 없다고 그는 장담했다.
케임브리지 공산주의자: 쿠마라망갈람이 다니던 1930년대의 케임브리지대학은 많은 공산주의자를 배출했다. 소련을 위한 간첩행위로 이름을 날린 “케임브리지 5인방(Cambridge Five)”이 이 무렵 케임브리지 출신이었다.
다음 행선지는 도쿄였다. 몇 해 전 일본에 가서 초년의 공부를 의지했던 중국학 대가들을 만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학술 목적이 아니었다. 현재의 정치에 초점을 맞추고 전혀 새로운 영역을 살피러 간 것이다. 일본공산당 지도자 미야모토 겐지(宫本顯治)와 노사카 산조(野坂参三)는 만나지 못하고 당 기관지 〈아카하타(赤旗)〉의 논설위원 몇 사람만 만났다.
일본공산당이 여러 해 동안 중-소 대립에 중립적 입장을 취해 왔다고 들었다. 논설위원들은 당이 강경노선을 요구하는 마오쩌둥의 압력 때문에 지지를 잃어 온 사정을 설명했다. 또 한편으로는 새 제국주의 세력 미국에 대한 흐루쇼프의 유화정책에 반대했다. 일본공산당 내에서 치열한 논쟁이 일어나 일부가 이탈, 다른 좌익 정당으로 옮겨갔다.
인도와 일본의 공산당원들을 만나면서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한 “비밀 연설”과 폴란드와 헝가리 봉기 후 영국, 프랑스와 이탈리아 공산당에 일어난 변화에 관해 읽은 것이 생각났다. 일본공산당과 인도공산당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지만 공개적 분열에 이르지는 않았다. 중국의 대약진운동이 시작되고서야 뚜렷한 균열이 나타나 인도공산당은 둘로 쪼개지고 일본공산당은 많은 청년당원을 잃었다.
비밀 연설: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은 후 소련공산당 제1서기에 오른 흐루쇼프는 스탈린 시대의 철권정치를 탈피하는 노력을 기울였고, 1956년 2월 당 대회에서 발표한 “비밀 연설”이 그 절정이었다. 이름은 “비밀”이지만 사실은 스탈린 시대에 대한 “공개” 비판이었다.
인도공산당과 일본공산당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서로 다른 경험들이 부각되어 나타났다. 베트민은 전쟁에서 프랑스를 꺾었는데, 전쟁은 미국의 지원으로 계속되고 있다. 버마,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는데 그것을 하지 않은 인도네시아공산당이 박멸당했다. 사이공 사람들이 자기네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탄손누트 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밟는 동안 멀리서 폭음이 들려왔다. 호텔은 경비가 삼엄한 조용한 동네에 있었고 많은 집에 꽂혀 있는 영국, 프랑스 등 유럽국 깃발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베트콩 지지자들에게 “미국인 아님”을 알리는 표시라고 들었다.
촐론의 중국인 구역에서 광둥어로 이야기 나눈 사람들은 중화민국(ROC) 여권을 갖고 있지만 친공 조직에도 기부금을 낸다고 했다. 베트콩은 사실 민족주의자일 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말라야공산당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진 말라야 친구들이 생각났다. 확실한 차이는 베트콩 지도자들이 현지인인 반면 말라야공산당의 중국계 지도자들은 말레이 대중에게 외래인으로 인식되고 중국공산당의 추종자로 지목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경험한 내용을 〈아시아 매거진〉에 적어주면서 우리 지역과 관계된 결론은 아무것도 내리지 않았다. 혁명에 다양한 모습이 있다는 설명과 그중에는 꽤 오래 계속될 것도 있겠다는 전망만 내놓았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혁명의 목소리는 아직 들려오고 있었으나 태국과 사라와크 국경지대의 전투는 2년 전 선출된 싱가포르(1963)와 말레이시아(1964) 정부에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다. 사이공에서 돌아온 후 돌이켜 생각하니 큰 태풍이 닥쳐오기 전의 국지적 평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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