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식민지 아닌 독립국으로 버티려…참전도 불사, 태국 생존법 [Focus 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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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란트를 점령한 군대

1919년 6월 28일, 연합국과 독일은 공식적으로 전쟁을 끝내는 강화 조약에 서명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를 논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베르사유 조약'이다. 핵심은 독일이 다시는 도발에 나서지 못하도록 힘을 빼는 것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막지는 못했다. 모든 책임을 독일에만 묻고 가혹한 제재를 가한 결과였다. 독일이 허락받은 군비는 모욕적이라고 느낄 정도였고 배상금은 감당하기 버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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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대로 베르사유 조약문에 서명하는 각국 대표단. 혹독하게 독일을 제재했으나 결국 더 큰 전쟁을 막지 못했다. 위키피디아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 때문에 모두가 새로운 전쟁을 원하지 않았으나, 염전 사상에 물들어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무너졌던 프랑스와 달리 독일은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맹렬히 싸웠다. 베르사유 조약의 압박으로 인해 복수하겠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독일이 받은 군사적, 경제적 제약은 극심했다.

여기에 더해 승전국들은 13% 정도의 독일 영토와 식민지 전부를 빼앗았다. 특히 라인강 서쪽 접경 지역, 즉 '라인란트'를 비무장화하고 감시를 위해서 군대를 주둔시켰다. 당연히 독일은 반발했으나, 프랑스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가 조약이 너무 유화적이라고 불만을 드러냈을 정도로 독일을 옥죄는 데 앞장선 프랑스는 나폴레옹 시절의 괴뢰국인 라인동맹처럼 독일을 분할하지 않은 것을 감사해야 한다고 윽박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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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시가지에서 행진 중인 프랑스 점령군 소속 모로코 소총병 제3연대. 위키피디아

독일은 강화 조약이 체결됐음에도 엄연한 자국 영토 안에 점령군이 주둔한 현실에 대해 상당한 모멸감을 느꼈다. 비록 로카르노 조약이 체결된 뒤 모든 점령군이 철군했으나, 아돌프 히틀러가 재군비를 선언하고 나서 제일 먼저 벌인 군사 행동이 라인란트 재무장이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이처럼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 동안 승전국과 독일에게 라인란트는 뜨거운 감자였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이 이루어지자마자 60만 명의 연합군이 국경을 넘어가 독일군 무장 해제에 나섰을 만큼 라인란트 점령은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기도 전에 첫째로 단행된 연합국의 제재 행위였다. 이때 복수에 혈안이 된 프랑스는 가장 많은 22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1920년에 10만 명으로 감군했으나 1923년 배상금 지연을 빌미로 루르까지 점령지를 확대하기도 했고 모든 점령군 중에서 가장 마지막인 1930년에서야 철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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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6월, 점령군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철군하는 베스트팔렌 주둔 프랑스군. 이때만 해도 대립의 시절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것으로 생각했다. 위키피디아

영국과 미국도 각각 20여만 명의 군대를 주둔시켰으나, 독일을 혹독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1920년에 2만 명 수준으로 병력을 대폭 감축했고 미군은 1923년, 영국군은 1925년 각각 점령지 통제권을 프랑스군에 양도한 뒤 부대를 철수시켰다. 국가 규모를 고려할 때 전쟁 피해가 가장 컸던 벨기에는 비록 병력이 2만 명에 불과했지만, 1923년 프랑스군이 루르 점령에 나섰을 당시에 함께 했을 만큼 라인란트 점령에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이들 4개국 외 의외라고 생각될지 모르는 나라의 군대가 라인란트 점령에 참여했다. 지구 반대편 동남아시아에서 온 시암군, 즉 태국군이었다. 병력 규모가 두 개 대대 정도였고, 주둔했던 기간도 가장 짧은 10개월에 불과했다. 그러나 태국군은 라인란트를 점령했던 5개국 군대의 당당한 일원이었다. 다시 말해 태국은 독일과 교전을 벌인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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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르세유 도착 직후의 태국군. 이들 중에는 태국 공군 창설을 위해 교육을 받으러 온 요원도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공군이 태동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앞선 발걸음이었다. 위키피디아

태국은 1917년 7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한 뒤 연합군의 일원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태국에 거류하는 해당국 시민을 감시하고 자산과 입항한 선박을 압류하는 식의 외교적 적대 행위를 펼쳤을 뿐이었으나, 이듬해 공군 창설 요원이 될 370명의 훈련 장병을 포함한 총 1284명의 병력을 프랑스에 파견했을 만큼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태국의 선택

원래 연합국, 동맹국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전쟁이 일어나고도 한참 동안 중립을 유지하던 태국의 갑작스러운 참전은 라마 6세의 결단 때문이었다. 왕세자 시절 영국 샌드허스트 군사학교 등에서 공부했던 그는 국제 정세를 보는 안목이 탁월했다. 그가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런 결정한 이유는 전쟁이 끝난 뒤 대대적으로 변할 것이 확실한 국제 질서 재편과정에서 태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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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한 시암(태국)의 라마 6세. 어려서부터 외국어 교육을 받았고 영국 샌드허스트 군사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등에서 수학해서 국제 정세를 바라보는 안목이 있었다. 위키피디아

당시 태국은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독립국이었다. 그런데 남아시아에서 식민지 확보 경쟁을 벌이던 영국과 프랑스가 중간에 위치한 태국을 건드리지 않기로 약속했기에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아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이는 세계사를 강대국 입장에서만 본 엄청난 오해다. 일단 제국주의 시절에 열강들이 충돌을 막으려 양측 세력권 사이에 중립을 전제로 독립국을 둔 적은 없다.

아프리카를 분할한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 보듯이 열강들은 시쳇말로 1㎜의 여유도 없이 식민지를 나눠 가졌다. 1898년 파쇼다 사건이나, 20세기 초 두 차례 모로코 위기처럼 충돌이 벌어지면 협상으로 정리하고는 했다. 그 과정에서 피지배인의 의사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기에 굳이 중립 지역이라는 공백을 둘 필요가 없었다. 그러한 혼란의 시대에 태국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외세의 지배를 막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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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의 아프리카 분할도. 이처럼 열강들의 협상으로 식민지를 나누어 차지했기에 굳이 중립 지역을 둘 필요가 없었다. 태국의 독립은 강대국의 필요 때문이라기보다 스스로의 노력이 있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위키피디아

한때 태국의 강역은 오늘날 라오스·캄보디아·코친차이나라고 불리는 베트남 남부, 미얀마 동북부와 동남부, 말레이시아 북부에 이르렀으나 19세기 말부터 인도에서 동진하던 영국과 베트남에서 서진하던 프랑스의 위협을 받게 됐다. 이에 압력이 들어오면 변방의 영토를 조금씩 떼어주고 태국 내에서 치외법권을 허락하는 식으로 독립을 유지해 나갔다. 당연히 힘의 차이를 인정하고 엄청난 굴욕을 마음속으로 삭혀야 했다.

대신 태국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자신들을 식민지화하지 않고 열강의 요구를 잘 따르는 독립국으로 남겨 놓을 경우의 이점을 수시로 설명했다. 다시 말해 태국의 독립은 영국과 프랑스가 자기들끼리의 충돌을 막으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라 태국이 이들의 압력으로부터 국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이런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연합국 편에 붙어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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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적응 훈련 후 전선으로 이동하기 위해 대기 중인 태국군. 약 두 달 정도 실전을 벌였고 전사자는 없었다. 다만 19명이 당시 유행한 스페인 독감으로 순직했다. 위키피디아

1918년 7월 30일, 마르세유에 도착한 태국군은 현지 적응 훈련을 거친 뒤 9월부터 프랑스군 예하로 편제돼 11월 종전 때까지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비록 실제 전투 참여 기간은 두 달 정도에 불과했고 병력도 전쟁의 규모를 고려한다면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참전 효과는 상당했다. 일단 앞에 소개한 것처럼 휴전 직후 라인란트를 점령한 5개국 군대 중 하나가 되었다.

이듬해 승전국의 일원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고 파리에서 열린 연합국 승전 퍼레이드에 참여했다. 또한 국제연맹의 창립 회원국이 되면서 당당한 국제 사회의 일원임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참전 대가로 영국·프랑스·미국이 태국에서의 치외법권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비록 상실한 영토를 오늘날까지 회복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태국은 국권을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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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7월 14일, 파리에서 열린 연합군 합동 승전 행사에서 퍼레이드 중인 태국군. 당당히 승전국이 되면서 열강과 강제로 맺었던 여러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었다. 위키피디아

광기의 제국주의 시대에 태국이 보여준 행보는 많은 생각을 들게 한다. 같은 시기에 중립국화 시도가 외세의 간섭으로 좌절된 대한제국과 비교하면 특히 그렇다. 두 나라의 가장 큰 차이는 국제 정세를 거시적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위정자의 능력이었다. 비록 지금은 대놓고 약소국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시대는 아니나, 국제 질서는 여전히 힘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기에 충분히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례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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