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경찰청 과학수사대 감식반이 '복날 살충제 사건'이 벌어진 경북 봉화군 봉화읍 내성4리 경로당을 찾아 감식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북 봉화군에서 발생한 ‘복날 살충제 음독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이 병원에 입원한 피해자를 상대로 대면 조사를 하기로 했다. 또 경로당 회원 등 주민 DNA도 채취해 분석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마지막으로 쓰러진 80대 할머니는 커피를 마시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23일 경북경찰청 수사전담팀 등에 따르면 안동병원 응급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던 할머니 A씨(78)와 B씨(65)는 상태가 호전돼 전날 일반병실로 옮겼다. 이들은 현재 호흡기 치료중이며 질문에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의료진 판단을 거쳐 피해자들과 대면 조사 일정을 조율할 방침이다.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다른 피해자 3명 중 C씨(75)는 의식을 찾았지만, 나머지 D씨(69)와 E씨(85)는 중태다.

앞서 초복이었던 지난 15일 이들은 봉화군 봉화읍 내성4리 경로당 회원들과 함께 인근 식당에서 보양식을 먹은 뒤 경로당에 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중 E씨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은 경로당에서 커피를 마시고, E씨는 마시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평소에도 경로당에 있던 냉장고의 커피를 마셔왔기 때문에 사건 당일에도 별다른 의심 없이 커피를 마신 것으로 알려졌다.

B·C·D씨는 사건 당일 살충제 중독 증세를 보이며 쓰러졌고 A씨는 사건 당일 탈수 증상이 나타나 집 근처 병원에서 치료받은 뒤 귀가했다가 다음 날 증상이 나빠져 안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E씨는 3일 뒤인 18일 같은 증상을 보이며 쓰러져 안동병원으로 이송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분석 결과 이들 5명 위세척액에서는 동일한 살충제 성분이 나왔다. 에토펜프록스와 터부포스 성분이다. 에토펜프록스는 모기·파리 등 해충 퇴치용으로 가정에서도 흔히 사용되는 살충제지만 독성은 낮다. 하지만 터부포스는 독성이 강한 살충제다.

지난 18일 오전 경북 봉화군 봉화읍 내성4리 경로당 일대가 적막하다. 이 경로당에 다니는 여성 주민 5명이 점심을 먹고 차례로 쓰러져 경찰이 수사 중이다. 연합뉴스

경찰은 이들 성분이 모든 피해자에게서 검출됨에 따라 누군가가 이들이 섭취한 음식이나 음료에 살충제를 넣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사건 발생 장소가 농약을 쉽게 구할 수 있는 농촌 지역인 만큼 농약 구매 내용만으로는 용의자를 압축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한다.

경찰은 피해자 등 경로당 회원의 유전자(DNA)도 확보해 분석하고 있다. 경찰은 경로당에서 확보한 컵 등 용기에서 살충제 성분이 확인되자 이와 관련이 있는 DNA가 있는지 비교 분석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함께 경찰은 경로당 주변 폐쇄회로TV(CCTV) 자료도 다량 확보해 들여다보고 있다.

이처럼 수사가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의문점은 증폭되고 있다. 경로당 냉장고에 있던 생수병에 담긴 커피를 피해자 5명 전원이 마신 게 아니어서다. 커피를 마시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E씨에게서도 살충제 성분이 검출된 점으로 미루어 다른 음식이나 음료에 살충제가 들어있을 수 있다.

E씨가 다른 피해자들보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살충제 중독 증세를 보인 것도 의문이다. 다른 피해자는 초복 당일인 15일부터 증세를 보여 병원 치료를 받기 시작했지만, E씨는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서야 호흡 곤란, 근육 경직 등 증세로 입원했다.

경북 안동시 경북경찰청 청사 전경. 김정석 기자

이번 사건은 앞서 9년 전 발생한 경북 상주 ‘농약 사이다’ 사건과 마찬가지로 주민 간 원한이나 갈등에 의한 ‘독극물 테러’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어떤 원한이나 갈등 관계가 있었는지는 쓰러진 피해자들이 의식을 온전히 찾은 뒤에야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

경찰 관계자는 “아직 수사 중인 사안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단서가 발견됐고 수사가 어느 정도까지 진척이 됐는지 밝힐 수 없다”면서도 “현재 여러 가지 유의미한 증거들을 확보한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