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행동 얻었지만 불씨 남긴 강제성 제외…"日 진정성 보일 조치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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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광산 갱도 내부의 모습. 김현예 특파원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이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린 장소인 일본 사도광산이 27일 컨센서스(전원 합의) 방식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국은 일본 측이 조선인 노동자를 추모하고 가혹한 노동환경을 알리는 전시물을 현지에 이미 설치하고, 매해 일본 중앙정부 관계자가 참석하는 추도식을 열기로 약속한 것을 전제로 찬성했다. 다만 일본이 한국인 동원 및 노역의 강제성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으면서 역사적 사실을 자의적으로 왜곡할 여지를 남겼다는 지적이다.

세계유산위원회(WHC) 위원국인 한국은 일본이 전체 역사를 반영하지 않은 채 시기를 에도 시대로만 한정해 사도광산 등재를 시도할 경우 투표 대결도 불사한다는 방침으로 일본과의 협상에 임했다. 통상 세계유산 등재는 컨센서스로 이뤄지는데, 한 위원국이라도 반대하면 투표절차를 통해 위원국 3분의2 이상이 찬성해야 등재가 가능하다.

정부가 협상 과정에서 방점을 찍은 건 담보할 수 없는 말보다 즉각 나타나는 행동이었다. 일본 측이 2015년 군함도 등재 당시 "많은 한국인과 다른 이들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환경 아래서 강제로 노동한 사실이 있음을 인식한다"고 밝혔지만, 이후 강제노역 피해자들을 제대로 추모하고 실상을 알리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걸 반면교사 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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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 광산 인근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이 28일 조선인 노동자 관련 전시물이 있는 새로운 전시 공간을 공개했다. 작은 전시실에 노동자 모집·알선에 조선총독부가 관여했음을 설명하는 패널 등이 설치됐다. 사진은 박물관 외관 모습. 연합뉴스

등재가 확정되기 며칠 전에 사도광산 인근에 있는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조선인 노동자와 관련한 전시공간 마련한 것도 '선제적 조치'를 강조한 정부의 입장이 반영된 결과다. 부도 위험이 있는 '어음'이 아닌 확실한 '현금'을 챙긴 셈이다.

하지만 일본 측이 이번에 강제성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대목이다. 카네 타케히로 주유네스코 일본 대사는 WHC 회의에서 등재가 결정된 뒤 "일본은 한국인 노동자들이 처했던 가혹한 노동환경과 그들의 고난을 기리기 위해 새로운 전시물을 사도광산 현장에 이미 설치했다"며 매해 추도식을 열겠다고 밝혔지만, 동원과 노역의 강제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일본 정부는 그동안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채택된 모든 관련 결정과 이에 관한 일본의 약속들을 명심할 것(bearing in mind)"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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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광산 노동자들 관련 전시관 등을 안내하는 '아이카와 향토박물관' 안내 브로셔 별지. 사진 외교부

이와 관련,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27일 기자들과 만나 "되풀이해서 표현만 안 했을 뿐이지 ('명심'이라는 표현에) 과거 약속을 그대로 이어가겠다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라며 "표현을 갖고 협상력을 허비하기 보다는 그건(강제 노역 인정) 이미 우리가 챙겨 놓은 것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컨펌(confirm·확인)만 하면 되는 것이고 더 나은 이행 조치를 챙기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강제성을 말로 또 반복하기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게 했다는 취지로 읽힌다. 실제 이번에 마련된 전시 공간에는 한국인 노동자가 '도주'했다 수감됐다거나, 계약기간이 만료된 뒤에도 "취로(就勞)"하게 했다는 기록물이 전시됐다. 당시 노동자들이 인신 구속 상태에서, 합법적 노동 계약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노동이 이뤄졌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사료다.

하지만 전례를 봤을 때 일본 측이 자국에 유리하게 해당 대목을 왜곡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사도광산 등재 자체만 자축하고, 강제성은 부인하거나 희석할 우려다.

당장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28일 한·일 정부 간 물밑 협상과 관련해 "일본이 강제노동 문구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현지에 상설 전시를 하고 한반도 출신 노동자가 1500명인 것과 노동환경이 가혹했다는 점을 소개하는 방안 등을 타진해 한국이 최종적으로 수용했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 외교부 당국자는 "전혀 사실 무근"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이는 "강제성 표현 문제는 2015년에 정리됐다"며 "당시 합의는 그대로 있는 것이고, 일본이 그것을 포함해 모든 약속을 인정한 상태"라는 정부의 설명과 다소 결이 다른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내용이다. 마치 한국이 이번에는 강제성은 인정하지 않아도 되도록 합의한 것처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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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니가타현 사도섬에 남아있는 조선인 취사장터. 김현예 특파원

이와 관련, 야당은 정부를 향해 "친일을 넘어 내선일체(內鮮一體) 수준"이라며 비판했다. 28일 강유정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서면 브리핑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강제노역에 동원된 비극적인 역사 현장이 군함도에 이어 또다시 세계적인 명소로 조명받게 됐다"며 "(일본의)전시물에선 '강제동원'이라는 표현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강제성 누락에 대한 국내 여론의 우려가 여전한 가운데 결국 관건은 일본의 후속 조치라는 지적이다. 당장 사도광산 등재와 관련, 강제성을 부인하는 듯한 일본 정부 관료나 언론의 입장은 향후 한·일 관계에 커다란 악재로 번질 수 있다. 군함도 세계유산 등재 때 약속한 일본의 추모 조치도 아직 미흡하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정부는 사도광산은 사도광산대로, 근대 산업시설 유산(군함도 등)은 그것대로 일본에 후속 조치 이행을 촉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후속조치 미흡시 "국제사회에서 평판에 금이 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송경호 연세대 정치학과 BK21 연구교수는 "기본적으로 일본은 약속대로 조선인 강제동원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후속 조치를 진정성 있게 추진해야 할 것"이라며 "정부도 건강한 한·일 관계 복원을 위해 일본의 후속조치 이행을 촉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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