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허영만 선생이 작업 중 숨졌다' 그를 있게 한 미리 써 둔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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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립미술관 전시장에 재현한 작업실에 허영만이 앉았다. 광양=권근영 기자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가세가 기울어 포기했다. 여수고 3학년 올라갈 때 일이다. 5일 전남 광양 전남도립미술관에서 만난 허영만(75)이 돌아본 가장 가슴 아팠던 순간이다. 1965년 만화가 김석 문하생으로 들어가 박문윤ㆍ엄희자ㆍ이향원 문하를 거쳤다. 가난 때문에 택한 만화였지만 데뷔 첫해부터 이름을 날렸다. 1974년 한국일보 신인 만화 공모전에 ‘집을 찾아서’가 당선됐고, 같은 해 소년한국일보에 연재한 ‘각시탈’이 흥행했다. 데뷔 50년을 맞은 만화가 허영만이 6일부터 특별전 ‘종이의 영웅, 칸의 서사’를 연다.

광양 전남도립미술관 ‘종이의 영웅, 칸의 인생‘

일제에 맞서는 ‘각시탈’은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됐다. 애니메이션 ‘날아라 슈퍼보드’는 방영 당시 시청률 42.8%를 기록했다. 청춘의 위태로운 방황을 그린 ‘비트’부터 도박을 낱낱이 파헤친 ‘타짜’도 빼놓을 수 없다. 권투ㆍ야구부터 화투ㆍ골프ㆍ관상ㆍ주식에 미식까지…. 끊임없이 색다른 소재를 찾아내 우리 사회의 관심사를 주도해 온 허영만이다. 시대를 품고 매스미디어로 확장해 일상이 된 허영만의 만화 인생이 전시장에 펼쳐진다. 2015년 서울 예술의전당 최초의 만화가 개인전에 이어 도립미술관 최초다. 만화 원화와 드로잉, ‘비트’를 그리기 위해 모은 패션 화보와 오토바이 스크랩 같은 취재 자료까지 2만여 점을 전시장에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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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를 발랄하게 그려낸 '미스터 손'은 TV 애니메이션 '날아라 슈퍼보드'로 어린이들을 사로잡았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오정' 캐릭터와 함께 한 허영만. 광양=권근영 기자

"참 열심히도 그렸네." 함께 전시장을 둘러보며 허영만이 가장 자주 한 말이다. 그는 ”50년 세월이 이렇게 갔네요. 남들은 제가 놀러만 다닌 사람인 줄 알지만, 다 그린 뒤 놀러 다녔지 펑크 내고 놀지는 않았어요(웃음). 아이들과 마누라에게 ‘난 정말 열심히 살았다. 뒤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합니다”라고 말했다.

동시대 만화가 중 가장 오래 활동하면서, 또 한결같이 정상을 지키고 있는 비결이 뭘까요.
“저는 1등 했던 적이 없어요. 그전엔 이상무 선생님이 1등이었고, 이어서 이현세 선생이 나타났죠. 오래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아요. 비결이라면 소재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이랄까. 밥 먹다가도 생각나면 메모하고, 식당에 메모지 없으면 냅킨에 고추장 묻혀서도 적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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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책상 앞에 적어둔 '결심'. 광양=권근영 기자

요즘도 새벽 4시에 일과를 시작하나요?
“그전엔 4시쯤 일어나 5시쯤 작업실 갔죠. 1시간은 먹고 화장실 가고 씻는다 치고, 6~12시까지 6시간만 집중적으로 일해도 사실 그 날 하루는 충분히 일한 거죠. 낮잠은 꼭 잡니다. 지금까지 버텨온 활력소에요. 요즘은 5시쯤엔 눈이 떠지지만 바쁜 일 없으니 오후에 화실 나가고 저녁엔 술친구 찾죠. 술을 못 끊으라니 술을 끊으라는 사람을 끊어야겠다 싶더군요(웃음). 그래도 2차는 죽어도 안 갑니다.”

전시장에는 서울 강남구 자곡동 그의 작업실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책상 앞에 이런 메모가 붙어 있다. “생각 즉시 행동! 꾸물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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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책상 앞에는 '많은 결심'이 적혀 있다. 광양=권근영 기자

만화라는 매체만의 장점, 매력은 뭘까요.
“원고지가 하얗거든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걸 내 맘대로 그릴 수 있으니까, 지금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그대로 독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으니까, 꿈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그래서 좋아요. 지금 생각해도 저는 애 같은 어른 아닌가 싶어요.”
웹툰도 그리나요.  
“(웹툰이) 이렇게 성장할 줄 몰랐어요. 예전 가수들 TV 나와 근황 얘기할 때 ‘준비 중입니다’ 하죠, 저도 준비 중입니다. 허영만이라는 타이틀은 빼고, 다른 필명으로 연재해 보고 싶어요. 과연 이렇게 해도 통하나. 서너 달 정도는 연재할 수 있는 웹툰 준비해뒀어요. 그런데 요즘의 큰 매체에서는 ‘이렇게 그려선 안 됩니다’ 하고 딱지 놓을 것 같아요. 그럼 혼자 해야죠. 얼마 전 인스타그램도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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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 없는 창작으로 한국 만화의 '타짜'가 된 허영만. 광양=권근영 기자

허영만은 5월이면 각급 사회단체들이 '유해 콘텐트'라며 '만화 화형식'을 치르던 시절 데뷔했다. 기복 없는 창작으로 대본소(주요 스토리라인과 장면을 메인 작가가, 나머지는 제자들이 채우는 문하생 시스템)부터 만화잡지, 웹툰 시대까지 경험했다. 고바우만화상(2007), 대한민국 국회대상 만화 애니 부문(2008), 보관문화훈장(2022)을 받았다. 스스로 그린 부고에 이렇게 적었다. ”허영만 선생이 작업 도중 숨졌다. 향년 107세. 타살 흔적은 없고 코피가 1㎝ 정도 났을 뿐 평소와 다름없이 건강한 모습이었다. 만화의 만화를 위한 만화에 의한 인생이었다.“

어떤 작가로 남고 싶으세요.
”암으로 돌아가신 소설가 최인호 선생이 ‘나는 작가로 남고 싶다. 책상 위에서 글 쓰다가 죽고 싶다’고 쓰신 글 좋아합니다. 저도 화판 위에서 죽고 싶습니다. 묘비엔 이렇게 쓰고 싶어요. ‘저로 인해 상처받은 자들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농사를 지어도 위에서 내려오는 물 때문에 이집 저집 싸울 수 있어요. ‘그럼 난 제일 위에서 농사지어야겠다’ 생각하거요. 또 지금의 웹툰 작가들이 종이 작가를 얼마나 인정해줄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 생각에도 ‘아, 이런 작가가 있었다’ 하면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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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소설가 최인호의 부고를 접한 뒤 그린 본인의 부고. 당시 64세였다. 1947년 여수에서 태어났지만 스스로는 주민등록상 생년인 1949년생으로 쓴다.

9월 7일에는 허영만 작가와 박인하 평론가의 대담이 있다. 전시는 10월 20일까지, 성인 1000원. 내년엔 고향 여수에 허영만 만화기념관이 개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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