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지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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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하이 마지막 청사인 마당로 청사. 1926년~1932년 4월말 사용했다. 사진 고수석

광복절이 다가온다. 올해는 79주년이다. 해마다 광복절은 돌아오지만, 이때만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는 건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광복을 위해 독립운동가들이 흘린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게 아닌가. 아직도 살아있는 그들의 거친 숨소리를 듣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찾아갔다. 중국 땅에서 한국 혼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상하이-자싱-항저우를 답사했다.

상하이(上海).
인구 2500만 명의 세계적인 국제도시다. 오는 8월 15일은 광복 79주년이 되는 날이다.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상하이를 찾았다. 상하이는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시작된 곳이다. 그러면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왜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세우려고 했을까?

잠시 과거로 시계를 돌려보자. 상하이는 1842년 난징조약으로 영국에 의해 강제 개항했다. 점차 상하이 일부 지역에 영국‧미국‧프랑스의 조계지(치외법권)가 생겼다. 중국으로서는 굴욕의 100년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 조계지 가운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선 곳은 프랑스였다. 왜 프랑스 조계지였을까? 당시 전 세계 선진강국 가운데 정치적 망명자들의 정치 활동을 반드시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을 헌법에 담은 나라는 프랑스뿐이었다. 한마디로 프랑스는 망명정부를 허용한 것이다. 이는 프랑스대혁명 정신에 따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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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8월~10월까지 사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두 번째 청사로 알려졌다. 사진 독립기념관

프랑스 이외 다른 곳에 임시정부를 두면 언제든지 박해를 받거나 없어질 수 있었다. 따라서 임시정부를 프랑스 조계지에 두면 프랑스 정부가 헌법에 따라 보호해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연해주나 한성 등지에 흩어졌던 임시정부를 상하이로 통합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중국공산당이 1921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서 창당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번에 상하이를 찾으면서 꼭 가고 싶은 한 곳이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지다. 1919년 4월 10일 저녁에 이동녕‧이시영‧조소앙‧여운형‧신채호‧신익희‧손정도‧현순 등 독립운동가 29명이 모였던 곳이다. 우리가 상하이에 왔다가 방문하는 곳은 마당로(馬當路)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다. 임시정부가 1926년~1932년 사용했던 건물이다. 1919년 4월의 임시정부 탄생지가 아니다. 임시정부는 상하이에 있는 동안 여러 차례 옮겨 다녔다.

그래서 임시정부가 탄생했던 장소가 궁금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임시정부 탄생지를 찾아 이동했다. 서금이로(瑞金二路) 50호에 도착하니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지 유적지(大韩民国臨时政府诞生地旧址)’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상하이 황포구 문화관광국이 2016년 7월 7일 공포했다고 적혀 있었다. 건물은 개인 소유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 표지판을 찾게 된 것은 친절한 가이드 덩양즈(鄧陽芷)의 덕분이다. 출발하기 전에 기대하지 않고 부탁했는데 다행히 찾아주었다. 어찌나 고맙던지. 나중에 물어보니 본인도 그런 곳이 있는 줄 모르고 수소문해 찾아보니 있었다는 것이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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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지 유적지 표지판. 사진 고수석

이곳에서 1919년 4월 10일부터 1박 2일간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의정원(국회)을 만들어 국호‧정부형태‧임시헌장 등을 논의했다.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어마어마한 일을 한 것이다. 임시의정원은 초대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를 선출했다. 우리가 스포츠 경기에서 외치는 ‘대~한민국’이 이때 처음 탄생했다. 그 과정은 이렇다. 국호를 정하는데 다양한 이름들이 나왔다. 신한민국‧고려공화국‧조선공화국‧대한민국 등이다. 대한민국은 29명 가운데 한 명인 신석우가 제안했다.

대한민국은 1897년 10월 선포했지만 1910년 8월 일본에 빼앗긴 대한제국에서 ‘제(帝)’자 대신에 ‘민(民)’으로 바꾼 것이다. 이제는 황제의 나라가 아닌 국민의 나라를 만들자는 뜻이다. 하지만 반대도 있었다. ‘대한’ 때에 나라가 망했는데, 일본에 망한 나라 ‘대한’의 국호를 또 사용하는 것은 감정상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찬성한 이들은 “빼앗긴 국가를 되찾는다는 뜻에서 경술년에 잃어버린 국호인 대한제국에서 ‘대한’을 도로 찾아 사용하되 정치체제는 ‘제국’이 아닌 ‘민국’을 지향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라고 설득했다. 여기에 “중국도 신해혁명 이후에 혁신의 뜻으로 ‘중화민국’을 쓰고 있으니 대한민국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덧붙였다. 격론 끝에 결국 대한민국으로 결정했다. 그렇게 정해진 임시정부의 국호인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1948년 정부 수립에도 그대로 사용하게 된다.
국호를 결정한 임시의정원은 정부 조직안을 확정하고 내각을 인선했다. 정부 조직은 임시의정원이 입법부, 국무원이 행정부에 해당된다. 국무원은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삼고 내무·외무·재무·군무·법무·교통 등 6부를 두는 안으로 결의했다. 조선 시대 6조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내무-이조, 외무-예조, 재무-호조, 군무-병조, 법무-형조, 교통-공조. 인선은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법무총장 이시영 ▶교통총장 문창범 등을 선출했다.

그다음으로 임시헌장(10개 조)을 제정했다. 임시헌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헌법으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제1조를 ‘대한민국을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그대로 1948년 제헌헌법에 들어갔고 지금까지 불변의 헌법 제1조가 됐다.

하지만 29명이 임시정부를 수립했지만 만들기만 하고 직무를 거의 하지 못했다. 내각 인선을 보더라도 당시 상하이에 있었던 사람은 이시영뿐이었다. 나머지는 미국‧러시아에 있었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활동하려고 해도 재정이 없는 상태였다. 국내에서 보내주는 독립운동 자금으로 근근이 운영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하이 임시정부를 살린 사람은 안창호였다. 29명 가운데 한 명인 현순이 미국에 있는 안창호에게 SOS를 쳤다. 내무총장으로 내정됐으니 빨리 상하이로 오라고. 안창호는 상하이 일이 급하다는 것을 알고 배를 탈 준비를 했다. 일본 요코하마를 거치는 코스로 가면 30일이면 상하이에 도착하지만, 일본 경찰에 잡힐 것이 뻔했다. 그래서 하와이~호주~홍콩~상하이로 우회하는 배를 탔다. 50일이 걸려 1919년 5월 25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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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지. 상하이 황포구 서금이로 50호에 있다. 사진 고수석

당시 상하이 임시정부는 재정난으로 너무나 보잘것없는 청사를 사용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미국 교민들이 독립운동에 사용하라고 준 돈 2만5000달러의 일부로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안에 상당히 큰 건물을 전세로 얻었다. 회해중로(淮海中路) 651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임시정부를 소개할 때 나오는 그 양식건물이다. 2층 외벽에 당당히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지금은 그 건물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패션 의류매장인 H&M이 들어섰다. 이번에 그 장소를 찾았더니 건물은 리모델링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건물을 임대해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하는 것 외에 임시정부 직원들에게 월급도 주고 독립운동 요인들에게 활동비도 주었다. 비로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대로 운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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