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응급의료 붕괴 직전…"권역센터마저 전문의 1명이 지킨다" [의료공백 반년]

본문

17247899789823.jpg

지난 25일 대전의 한 권역응급의료센터에 도착한 119 구급대원들이 환자를 응급실로 이송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의료공백 장기화로 병원에 들어가는 관문(응급실)부터 구멍이 뚫렸다. 응급환자에겐 최후의 보루인 권역응급의료센터마저 전문의 한 명만 근무하는 곳이 많아지면서 중증 환자 챙기기도 버겁다.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나 전원 거부로 살릴 수 있는 환자가 숨지는 사례도 늘고 있다.

70대 뇌경색 환자 A씨는 지난달 말 입원 치료 중인 지방 재활병원에서 갑작스레 의식이 흐릿해지고 산소포화도가 떨어지는 응급 상황에 놓였다. 이 병원은 주변 대형병원 응급실에 A씨의 전원을 의뢰했지만, 모두 '병상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갈 곳이 없어진 A씨는 하는 수 없이 재활병원에 남게 됐고, 2시간여 만에 숨졌다고 한다. 이즈음 서울 편의점에서 쓰러진 환자, 공사 현장에서 사고를 당한 근로자도 각각 병원 10여곳을 돌다가 숨을 거뒀다.

이러한 응급 위기 뒤엔 의료공백에 따른 인력 부족이 깔렸다. 27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응급의학과 전문의 수는 지난해 2분기보다 118명 늘었다. 하지만 2월 의정갈등이 본격화된 이후 전공의 500여명이 사직하면서 실제 응급실 근무자는 크게 줄었다. 7월 기준 응급실에 남은 전공의는 55명에 불과하다.

17247899793521.jpg

박경민 기자

꾸역꾸역 버티던 전문의들은 점차 응급실을 떠나고 있다. 의료공백 반년을 넘어서면서 사직·병가가 속출하는 식이다. 경기 남부의 주요 권역응급센터인 아주대병원은 최근 전문의들이 줄사표를 내면서 21명이던 근무자가 12명으로 반 토막 날 위기다. 건국대 충주병원에선 지난주 응급의학과 전문의 7명 전원이 사의를 표명했다. 충북대병원은 지난 14일 전문의 2명이 병가를 내면서 응급실 운영을 일시 중단했다.

충북대병원 관계자는 "전공의 이탈 후 전문의 6명이 몇 개월째 밤낮 근무를 번갈아 서다 보니 응급실 운영이 한계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최근 사직서를 낸 강남성심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몇달 전 지병이 악화했지만 근무를 빠지면 다른 교수들 부담이 커지는 만큼 어떻게든 버티면서 근무를 했다. 하지만 더 버티기엔 심리적·체력적으로 힘들다"고 말했다.

상급종합병원 중심의 권역응급센터도 전문의 1명 근무가 '뉴노멀'이 됐다. 종합병원·병원 등에서 넘어오는 환자들이 쏟아지지만, 중증 환자 한 명 치료하기도 어렵다. 경환자 10명을 보는 것보다 중환자 한 명을 보는 게 인적 자원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김수진 고대안암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장(응급의학과 교수)은 "전문의가 8명뿐이라 낮 시간대 빼면 사실상 한 명이 근무한다"면서 "6개월 전엔 전공의를 포함해 대여섯명이 하던 일을 이젠 혼자 하는 셈이다. 중증 환자가 갑자기 3~4명씩 오면 다른 환자들은 볼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남궁인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도 "서울 한복판의 권역센터인데 매 듀티(당직)마다 의사는 나 혼자"라고 밝혔다. 아주대의료원 관계자는 "사직 의사를 밝힌 전문의가 나가면 주당 하루이틀 제한적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말했다.

172478997952.jpg

지난 25일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 응급실로 의료진이 들어서는 모습. 뉴스1

다른 응급의료기관 상황도 비슷하다. 강남성심병원 관계자는 "심폐소생술(CPR) 환자가 생기면 모든 인력이 다 붙어야 한다. 특히 야간에 CPR 상황이 잦은데 전공의도 없으니 다른 환자는 사실상 못 받는다"면서 "인원이 부족해서 다른 병원에서 오는 전원 환자도 예전만큼 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응급실 근무자를 충원하려고 해도 지원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전보다 근무 강도가 높아진 데다 의료 사고에 따른 부담도 작용해서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응급의학과 교수를 뽑으려고 학회 등 여러 채널을 통해 공고를 냈지만, 몇 달째 채용이 되지 않고 있다. 고연봉을 제시해도 별 반응이 없다"면서 "필수의료 기피 문제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인력 부족은 응급의학과에만 그치지 않는다. 내과·외과 등 뒤를 책임져줄 배후 진료과도 사람이 없어 응급실로 오는 환자를 더 못 받는다. 이른바 '빅5' 병원들도 응급실 종합상황판 사이트에 특정과 진료 불가 메시지를 띄울 정도다. 27일 서울성모병원은 혈액내과·비뇨의학과 등의 환자 수용 불가 공지를 올렸고, 서울아산병원도 인력 부족으로 정형외과 수술·입원이 어렵다고 밝혔다. 앞서 이달 초 구로역 사고 부상자도 배후 진료를 맡아줄 정형외과 전문의가 없어 16시간 동안 병원 4곳을 돈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 응급 위기는 더 빨라질 가능성이 크다. 응급실 근무자 피로도는 갈수록 누적되는데, 코로나19를 비롯한 경증 환자는 이미 평소 수준을 회복했다. 다음 달 추석 연휴엔 환자가 몰리면서 응급실 진료가 차질을 빚을 거란 우려도 나온다. 김수진 교수는 "추석에는 '번아웃'(소진) 오는 의사들이 많을 거 같아 제일 큰 걱정"이라면서 "이대로면 지금 같은 응급실 운영도 유지하지 못 하는 병원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0
로그인 후 추천을 하실 수 있습니다.
SNS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36,580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