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6·25 때 싸우다 전사한 이들…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유 [Focus 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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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25일, 낙동강 방어선에 도열한 아군은 일제히 진지를 박차고 나왔다. 치열했던 두 달간의 방어전이 끝나고 아군이 전략적 공세로 전환한 순간이었다. 열흘 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음에도 부산을 향한 공격을 중단하지 않았던, 낙동강 방어선 일대의 북한군이 마침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38선 이북으로 진격할 계획은 없었으나, 이는 장엄한 그러나 너무나 짧고 아쉬움이 많았던 북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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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28일, 미국 육군 제29연대 3대대가 북한군 제6사단의 매복에 걸려 전멸한 하동 가도. 미 제25사단은 이곳을 탈환하자 곧바로 두 달 동안 방치됐던 미군 전사자 시신을 수습했다. 위키피디아

낙동강 방어선의 가장 남쪽인 마산에서부터 반격에 나선 미국 육군 제25사단이 탈환에 가장 신경 쓴 곳은 하동이었다. 이때 전투부대를 바로 뒤쫓아 전장정리조(戰場整理組)가 함께 투입됐다. 이들이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앞선 7월 28일 하동전투에서 궤멸한 미 제29연대 3대대의 흔적을 찾는 것이었다. 기록과 생존자들의 진술을 근거로 전장정리조는 두 달 동안 일대에 방치돼 있던 미군 시신 313구를 수습할 수 있었다.

1951년 3월 7일, 중공군의 제4차 공세를 막아낸 유엔군은 반격에 돌입했다. 미 제9군단은 용문산~홍천 방향으로 공격을 개시했고, 선봉은 미 해병 제1사단이 담당했다. 이때 미 제2사단에서 파견 나온 전장정리조가 옆에서 동행했는데, 이들의 임무는 앞서 2월 횡성계곡에서 몰살당한 미 제10군단 21지원대의 전사자를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12일 횡성 북방에서 250여 구의 시신을 수습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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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지상군의 참전 직후인 1950년 7월 10일 충남 전의 인근에서 학살당한 미군 포로. 당시 일방적으로 패주하던 시기였지만, 미군은 학살 증거를 수집하고 예의를 갖춰 시신을 수습했다.위키피디아

옆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전우의 시신을 수습했던 위 사례들은 전사자의 유해를 반드시 책임진다는 미군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당시에 모든 분야에서 경험이 부족했던 국군은 이런 부분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전투 부대의 운용도 버거웠을 정도였는데 실종하거나 사망한 병사들을 찾기 위한 별도의 조직을 구성할 여유가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방송과 전산 체계를 이용해 대대적으로 벌인 이산가족 재회 사업이 6·25 전쟁이 멈춘 지 30년이 지난 뒤인 1983년에나 이루어졌던 것만 봐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그동안 먹고살기 힘들어 같은 땅에 사는 사람을 찾는 것도 여유를 내기 힘들었던 게 지난 우리의 모습이었다. 그러니 전쟁 중, 특히 전선의 등락이 급격했던, 최초 1년 동안 발생한 전사자 관리가 제대로 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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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KBS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장면. 산사람을 찾는 전국적인 시도도 휴전 30년이 돼서야 했을 정도니 전사자를 찾는 시도는 오랫동안 없다시피 했다. 국가기록원

전사자나 실종자의 확인은 즉시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치열한 전쟁터에서는 일단 살아있는 이들의 생명을 건사하는 일이 당연히 우선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 즉시 확인이나 정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그것은 앞에 언급한 미군도 마찬가지였다. 중공군의 제2차 공세 당시에 수습하지 못한 수많은 미군 전사자나 실종자를 북한 땅에 남겨 둔 체 황급히 38선 이남으로 후퇴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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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판문점을 통해 송환되는 미군 전사자 유해. 현재도 미국은 북한에 남아있는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중앙포토

그래서인지 미국과 미군은 북한지역에 남아있는 전사자의 유해를 발굴하여 본국으로 송환하는데 상당히 적극적이다. 전쟁 중 실종된 미군 유해 발굴 작업은 인도주의적 사안이라며, 핵 문제 등 다른 사안들과 연관돼서는 안 된다고 정부 대변인이 공식적으로 말할 정도다. 이면적으로 미국이 유해를 송환받기 위해 어떤 대가를 지불했는지는 모르나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는 늦었지만 2000년대 들어 본격적인 6.25 전사자 유해 발굴사업이 시작되어 그나마 다행이다. 발굴에 유효기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해를 찾아도 신원을 확인하기 힘든 경우도 많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전사자를 기억하는 이들이 갈수록 급격히 줄어들고 있기에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고인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사업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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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직전 공산군에게 생포돼 40여 년 간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2000년 탈북에 성공한 유영복 씨가 2018년 국정감사에서 생존 국군 포로의 송환을 촉구하는 증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

그런 점에서 지난 2000년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북으로 보낼 때 반대급부로 국군 포로나 납북자의 송환이 좌절됐던 점은 못내 아쉽다. 남북정상회담을 성사하려고 북한의 요구를 무리하게 수용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비록 이제는 그들의 생존도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래도 국가는 국민이 믿음을 갖도록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애국은 결코 강요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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