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정년이는 소년미 수준일뿐…여성들 미치게 했던 제3의 성,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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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정년이’로 본 여성국극의 미래
“정녕 태평성대인가/ 위에서 한나라가 벌컥 들이치고/ 동에선 낙랑이 비켜 들어오니/ 내 나라 신세 가련하다/ 이 어찌 태평성대란 말인가!” 짙은 메이크업과 과장된 의상으로 성별을 가린 남장 여인이 판소리와 유사하지만 가사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창법으로 노래한다. 여성국극을 소재 삼은 드라마 ‘정년이’가 보여주는 ‘자명고’ 공연 실황인데, 남장 여인의 카리스마가 엄청나다. 1950년대 반짝 인기를 끌었던 여성국극은 60년대 이후 오랜 침체기를 겪었지만, 결코 소멸되지 않고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해 왔다. 이런 장면이 TV 드라마로 방송되고, 밈이 되어 SNS를 도배하는 날이 오리라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게다.
종영을 앞둔 tvN 주말 드라마 ‘정년이’가 장안에 화제다. 굿데이터코퍼레이션의 TV-OTT 드라마 화제성 조사에서 4주 연속 1위를 차지했고, 출연자 화제성도 ‘정년이’ 5명이 톱7을 독식했다. 한국전쟁 직후 타고난 소리 천재 정년이(김태리)가 여성국극을 향한 꿈을 키우는 성장 드라마. 대세 배우 김태리를 비롯해 신예은, 정은채까지 남장 연기를 하는데, 여자끼리 질투가 아니라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워맨스 서사에 반응이 뜨겁다.
열풍은 수년 전 시작됐다. 서이레·나몬 작가가 2019년부터 3년간 네이버 웹툰에 연재한 동명 작품이 화제를 모았고, 지난해 국립창극단 버전은 전석 매진과 함께 젊은 여성 관객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며 창극 대중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남역 대명사 임춘앵, 카리스마가 곧 장르
정년이가 소환한 옛 여성국극은 인기 상종가지만, 실제 여성국극은 벼랑 끝 현실에 처해 있다. 여성국극이란 해방공간에서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던 국악계에 대한 반발로 박녹주·박귀희·임춘앵·조금앵 등 여성 명창들이 ‘여성국악동호회’로 뭉쳐 탄생시킨 최초의 K뮤지컬이다. 판소리를 바탕으로 하지만 남장 여배우를 포함해 여성들만 무대에 서는 파격적인 장르로, 첫 작품 ‘옥중화’(1948)는 실패했으나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를 재해석한 ‘햇님과 달님’(1949) 이후 1950년대 번창했다.
인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정점을 찍은 55년 부산에서 공연된 혼성 창극 ‘만리장성’이 남역 최고 스타 임춘앵을 앞세운 여성국극 ‘황금돼지’와 맞붙어 크게 망했고, 그해 영화 ‘흑기사’보다 여성국극 ‘햇님과 달님’의 동시간대 관객이 2배가 넘었다는 기록도 있다. 공연을 놓치지 않으려다 극장에서 출산을 한 관객도 있고, 남역 스타는 극성 팬 성화에 가상 결혼사진까지 찍어줘야 했다.
탄생 10년 만에 빛을 잃은 이유는 ‘정년이’에 암시되고 있다. 후배의 싹을 자르고, 단체 간 분란이 일며, 회계 책임자가 횡령을 해도 속수무책이다. 실제로 60년대 들어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지 않고 진부한 레퍼토리를 반복하는 사이 영화와 드라마가 대중화되며 급격히 쇠락했다. 젠더 갈등 탓도 있다. 1962년 국립국극단이 혼성으로 창단되고 국악계가 남성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여성국극은 ‘변태적인 B급 예술’로 천시받았다.
그런데 ‘K전성시대’에 반전이 시작됐다. 전통예술 재조명 트렌드에 드라마가 이례적으로 ‘공연실황’을 길게 보여주며 장르의 매력이 어필되고 있다. 판소리 고어체를 벗어난 쉬운 가사, 화려한 미장센과 낭만적인 정서도 매혹적이다. 과거 전쟁으로 허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국극이 판타지로 채웠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지난해 국극 1·2·3세대가 힘을 합친 ‘레전드 춘향전’ 공연 당시 만났던 삼마이(웃음을 담당하는 조연) 조영숙(91) 선생은 “50년대에 미러볼을 돌리고 씨스루 의상을 입었을 만큼 화려한 장르인데다, 같은 사랑가를 불러도 판소리와는 감정 표현이 다르다”고 설명했었다.
핵심은 남장 여인의 존재다. 당시 금기였던 동성애 코드를 전제로 탄생한 대안적 장르라 가능했다. 드라마에선 부용이·고사장 등 원작의 퀴어 캐릭터가 사라졌지만 다른 관계 속에 은근히 동성애의 긴장감이 녹아 있다. 여역 스타 박옥진의 딸로 5살 때부터 국극 무대에 섰던 배우 김성녀는 “아이돌 느낌인 드라마 주역들보다 당시 남역들은 훨씬 성적 매력이 있었다. 동성애를 느끼고 헌신적인 팬들도 많았다”고 증언했다.
남역의 대명사는 임춘앵이었다. ‘여성국극은 임춘앵에서 시작해 임춘앵으로 끝났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압도적인 카리스마 자체가 곧 장르였다. 남장의 카리스마란 아무나 가능한 게 아니다. 정년이(김태리)는 소년미 수준이고, 라이벌 영서(신예은)도 남역 치고 선이 고운 반면, 가다끼(악역) 전문 백도앵(이세영)의 이미지가 사실적이고, 문옥경(정은채)의 발성과 비주얼이 오리지널 남역 스타를 연상시킨다. 정은채는 체격과 포스가 국극의 원형인 111년 역사 일본 다카라즈카의 레전드 남역 아마미 유키와 견줄 만한데, 마성의 매력으로 뭇 여성들을 설레게 하며 ‘인생캐’를 만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남역의 ‘마성의 매력’은 뭘까. 현실의 남성과 달라서다. 서구의 리얼리즘 연극과 달리 극도로 양식화된 동양 연극인 판소리에 기반한 데다 과장된 몸짓, 화려한 의상과 화장으로 ‘제3의 성’을 구축했다. 당시 가부장제에 억눌렸던 여성들은 현실적 젠더로부터의 해방감을 얻기 위해 여성국극으로 몰려들었다. ‘레전드 춘향전’을 만든 여성국극제작소 박수빈 대표는 “남장의 매력은 현실의 남자들에게 강요할 수 없는 섬세한 이상형에 대한 판타지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파워’에 대한 무의식적 열망의 반영이기도 하다. 심리학자 조지선 박사는 “젠더는 파워와 뗄 수 없다”면서 “여성들이 학습된 젠더 아이덴티티 때문에 파워를 자제하는 쪽으로 사회에 순종하고 살다가 중성적인 여성에게 파워에 대한 잠재된 욕망을 투영하며 매력을 느끼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전통적인 규범에 반기를 든 파격의 상징, 즉 ‘원조 걸크러시’가 바로 남역인 것이다.
그런데 국극은 갑작스런 인기를 감당할 시스템이 없었다. 40여개 단체가 난립하며 배우를 빼가는 등 무차별적으로 경쟁하니, 공연의 질이 저하되며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2000년대 초까지 간혹 지원사업을 통한 대형 공연도 있었지만, 팬데믹을 거치고 1세대들이 대부분 사망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분위기였다.
‘정년이’로 인해 불씨가 살아났다. 지난해 조영숙의 제자인 3세대 박수빈·황지영이 이끄는 여성국극제작소가 ‘레전드 춘향전’으로 사회적 관심을 호소했고, 올해 안산문화예술의전당 상주단체로 선정되며 제도권에 진입했다. 지난 4월 신규 단원 7명을 모집해 배우 양성에도 나섰고, 10월 고연옥 작가, 장영규 음악감독 등 특급 창작진이 가세한 신작 ‘화인뎐’을 올렸다. 외부에서도 관심을 보인다. 지난 여름 세종문화회관 기획 공연 ‘조도깨비 영숙’이 화제를 모았고, 조영숙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내년 1월 개봉한다.
“신파조 벗어나 새로운 시대 가치 담아야”
하지만 여성국극이 공연 업계에 유의미하게 부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국악이론가인 김희선 국민대 교수는 “50년대 신파조 스토리로 대중과 소통했던 여성국극이 이 시대 부활하려면 인문학적 성찰부터 필요하다. 여성들로만 구성된 창극을 넘어 어떤 서사로 울림을 줄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면서 “국립창극단도 판소리 5바탕을 벗어나지 못할 때 유사한 문제를 겪다가 2010년대 들어 동시대적인 레퍼토리와 스타 양성 등 관객과의 소통 장치를 만들어냈듯, 어떤 가치를 담을 것인지 예술감독이 강력한 기치를 걸고 표방해 가야 환영받을 것”이라고 짚었다.
내년 1월 대학로에서 8회 장기공연을 준비 중인 아르코 창작산실 선정작 ‘벼개가 된 사나히’가 대답이 될 듯하다. 60년대 국극 배우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란다. 박수빈 대표는 “이제 드라마를 통해 알려졌으니 실전 무대를 통해 니즈를 충족시키겠다”면서 “가장 큰 쇠퇴 이유가 후계 양성 실패라고 생각해 단원 모집이 큰 목표였고, 그들을 무대에 올린 ‘화인뎐’은 전원 남역으로 브로맨스를 담았다. 차기작은 이 시대에 피할 수 없는 방향성인 퀴어리즘을 담은 파격적인 공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국극의 존재 이유는 여전히 ‘파격’에 있다.
원조는 일본 다카라즈카…기업 지원 속 111년 지속
치명적 매력을 발산하는 남역의 원조는 다카라즈카(宝塚)다. 1913년 철도회사 한큐전철이 이용객을 늘리기 위한 여흥으로 만들었지만, 지금은 공연업계의 주류다. 국악 씬에 머문 여성국극과 달리 다카라즈카는 1920년대부터 프랑스 쇼인 ‘레뷰’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이국적인 매력으로 인기를 끌었는데, 라인댄스와 피날레 대계단 퍼레이드 등 화려한 시그니처가 지금까지 이어진다. 태평양전쟁 전후로 침체기도 있었지만, 70년대 순정만화를 각색한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대흥행으로 재도약했다.
롱런 비결은 전문적인 시스템이다. 한큐전철의 창립자 고바야시 이치조의 리더십 하에 1919년 설립한 음악학교를 통해 배우를 기르고, 남역 톱스타 중심으로 구성된 5개조가 1년 내내 순환공연을 하며 팬을 붙들어둔다. 대기업이 지원하는 안정적인 재정을 바탕으로 시대에 맞는 다양한 레퍼토리가 개발되고, 팬덤 관리도 앞서간다. 1918년 이미 소식지 ‘가극(歌劇)’을 창간하고, 1934년 공식 팬클럽을 창설해 조직화된 팬덤을 구축했다. 하지만 올해 음악학교 지원자 수가 사상 최저를 기록하는 등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단원 자살 사건으로 집단 괴롭힘과 과도한 노동 등의 문제가 불거진 탓이다. 급변하는 사회에 뒤처진 폐쇄적인 조직 문화가 개선을 요구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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