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AI로 복원한 유재하의 42년 전 노래..."하늘에서도 좋아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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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내 맘 속에 어둠이 내리면/ 어느새 저 밖은 별만이 가득한데/ 보라 빛 좋아한 그대는/ 내 작은 뜨락이라오.’
지난 7일 각종 음원 플랫폼에 고(故) 유재하의 노래 ‘별 같은 그대 눈빛’이 공개됐다. 고인이 데뷔하기 전인 1982년,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라이브로 부른 곡이다. 노래는 당시 그가 친하게 지내며 음악적 교류를 하던 밴드 '레모네이드'가 만들었다. 20살 청년 유재하의 순수하고 청량한 목소리는 오랫동안 카세트 테이프에 간직돼 오다 AI(인공지능) 기술 덕분에 42년 만에 세상 빛을 보게 됐다.
고인의 목소리를 세상에 내놓은 이는 레모네이드 전 멤버 유혁(63) 씨다. 이달 초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캠퍼스에서 만난 그는 “재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나도록 반가웠다. 이 감정을 혼자만 느끼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를 그리워하는 팬들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유씨는 음원 수익 전부를 유재하 장학재단에 기부하기로 했다.
'별 같은 그대 눈빛'는 80년대 활동한 밴드 레모네이드의 키보디스트 한석우가 작곡하고, 한석우의 지인인 최은정이 작사했다. 유재하는 당시 음악적으로 교류하던 친구 유씨를 통해 이 노래를 접한 뒤, 82년 한 라디오 방송에서 불렀다. 한국 대중음악사의 명반으로 꼽히는 데뷔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1987)를 발매하기 전이었다. 유재하는 데뷔 앨범을 발표한 지 몇 달 후에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목소리는 스물 다섯에 머물러 있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가리워진 길'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등 그가 남긴 9곡은 한국형 발라드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는 평가와 함께 후배 가수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짧지만 굵은 음악적 발자취를 남긴 그가 ‘별 같은 그대 눈빛’에 매료된 이유를 묻고 싶지만 그럴 순 없다. 대신 유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42년 전 음악에 심취해 있던 스무살 청년 유재하를 만날 수 있었다. 인터뷰는 유씨의 시각에서 정리했다.
42년 된 카세트테이프 속 목소리
유재하가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전날 밤 10시 쯤이었다. 내게 전화를 걸어와 레모네이드의 ‘별 같은 그대 눈빛’을 알려 달라고 했다. 어그먼트 코드(반음 올린 코드)의 독특한 멜로디 진행이 돋보이는 곡인데, 당시 한양대 작곡과 클래식 전공(81학번)이자 복잡한 코드의 노래를 좋아했던 유재하의 관심을 끌기에 딱인 노래였다. 전화기를 1시간 가량 붙들고 코드와 멜로디, 가사를 불러줬는데 곡을 이해하는 속도가 천재 같았다.
유재하는 음악을 들으며 놀 때도 악보부터 그리는 '배운 놈'이다. 당시엔 악보를 보며 음악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게다가 듣는 귀도 남달랐다. 영어는 못해도 팝송을 기가 막힌 발음으로 따라 부르곤 했다. 연세대 사회학과를 다니다 미국으로 유학 간 나보다 팝송을 더 잘 소화했다. 유재하는 “나는 귀가 좋잖아~”라는 농담도 종종 했다.
라디오 방송 당일엔 '별 같은 그대 눈빛'의 작곡자이자 밴드 멤버인 한석우를 집으로 불러 유재하가 노래하는 순간 카세트 레코더 녹음 버튼을 눌렀다. 생방송에서 배짱 있게 기타 반주에 맞춰 가사를 흥얼대는 게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 흥얼거림으로 전날 한 시간 배운 곡을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다. 한석우는 “조곤 조곤 말하듯 부르는 유재하 버전이 원래 내가 생각했던 원곡”이라며 "밴드 편곡이 들어간 레모네이드 버전보다 좋다"고 말했다.
그렇게 녹음했던 카세트 테이프를 40년 만에 지하실에서 발견했다. 미국에서 빅데이터 전문가로 38년 간 활동하고 있는 나는 카세트 테이프가 늘어짐 하나 없이 보관된 상태에 뿌듯함을 느꼈다. 동시에, 유재하의 목소리가 우리 집 지하실에서 이대로 썩어가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틀스 존 레논 음성 복원에 영감
유재하의 목소리를 디지털 음원으로 변환할 수 있는 방법부터 수소문했다. 음성 복원 업체에 맡겨보기도 했지만 녹음 상태가 불량한 탓에 음질이 좋지 않았다. 낙담하던 2023년 11월, 비틀스의 신곡이 나온다는 뉴스를 접했다. 1977년 존 레논의 목소리가 담긴 미완성 데모곡인 ‘나우 앤 덴’을 AI 기술로 복원한 뒤, 멤버들의 연주와 코러스를 더했다는 내용이었다.
비틀스 음원에 영감을 얻어, 유재하의 목소리도 AI 음성 분리 기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기술의 발전에 깜짝 놀랐다. 여러 과정을 거쳐 깔끔하게 유재하 목소리를 추출해낸 뒤, 이를 최대한 보존하는 방향으로 본격적인 음원 제작에 들어갔다.
튜닝 하나 없이 유재하 목소리에 새로운 악기 연주를 입히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생방송에서 긴장한 탓인지, 일부 구간의 박자가 불규칙해 드럼이나 기타를 붙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유재하의 박자에 내가 통기타 연주를 하면서 편곡자로도 참여하게 됐다. 유재하 감성을 살리기 위해 1980년대에 썼던 기타에 굵은 줄을 달아 연주했다. 예순이 넘은 내가 스무 살의 유재하와 협업하는 기분이 들어 녹음하면서 여러 번 뭉클했다. 완성된 후엔 1년 이상의 시간과 사비를 들여 제작한 보람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유재하를 본 건 1987년 미국에서 연 나의 신혼 집들이 때였다. 오랜만에 노래 한 곡 부탁하니 ‘나, 이제 데뷔 가수라 멍석 제대로 깔아야만 부른다’, ‘나, 가사도 잘 쓰지?’라고 하더라. 음악에 있어 뻔뻔하게 말해도 전혀 밉지 않은 사람이었다. 재하야, 많이 그리워서 낸 노래니까 하늘에서도 좋아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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