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얼굴 없는 천사는 옛말, 얼굴 내밀어야 주변서 기부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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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는 기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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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신애 한국모금가협회 상임이사가 중앙SUNDAY와 인터뷰하고 있다. 최기웅 기자

“남을 도울 때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가 미덕일 때가 있었어요. 기부자에게 지나치게 높은 도덕적 잣대를 적용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기부를 주저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고요. 그런데 요즘은 ‘얼굴 내미는 천사’가 대세가 됐어요.”

황신애(52) 한국모금가협회 상임이사는 최근 기부 방식과 트렌드가 예전과 사뭇 달라지고 있는 데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특히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에 의미를 더하기 위한 적극적인 기부가 크게 늘어난 점도 주목할 만하다. 팬클럽이나 동호회 차원에서 함께하는 기부가 대표적”이라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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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1호 ‘펀드레이저(기부 모금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황 이사는 1999년부터 한국외국어대·서울대·건국대·월드비전 등에서 모금 활동 전문가로 활약해 왔다. 그와 그가 속한 팀이 모금한 기부금만 5000억원이 넘는다. 이후 2014년 비정부기구(NGO)와 각종 시민·사회단체의 모금 활동을 지원하는 비영리 사단법인인 한국모금가협회에 창립 멤버로 합류한 뒤 한국의 기부 문화 활성화에 앞장서 왔다.

황 이사는 “26년 전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기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며 “지금은 1000명이 넘는 펀드레이저가 활동하는 것만 봐도 그동안 기부 문화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생 모은 유산 쾌척…고액기부도 급증

주목할 만한 최근의 기부 트렌드는.
“개인 기부자의 경우 과거엔 소액 정기 기부가 주를 이뤘다. 그런데 최근엔 상당한 금액을, 그것도 수차례 반복해서 내는 고액기부자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유산 기부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영국의 경우 유산 기부가 전체 개인 기부의 30%를 차지하는 반면 국내는 이제 시작 단계다. 유산 기부는 일반적인 기부와 성격이 전혀 다르다. 일반 기부는 대개 급여의 일부를 내는 거지만 유산 기부는 인생 전체를 살아오면서 모은 재산의 일부 혹은 전액을 내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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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간 10억원 넘게 기부한 전북 전주의 ‘얼굴 없는 천사’가 지난해 12월 노송동 주민센터 인근에 두고 간 성금 상자. [사진 전주시]

황 이사는 “유산 기부 약정을 체결해도 사망할 때까지는 집행되지 않는 만큼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앞으로 기부 문화가 성숙될수록 유산 기부를 비롯한 고액 기부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관련 법률은 물론 기부자의 인생 철학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시스템 구축과 전문가 양성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불경기에 오히려 기부액이 증가하는 현상도 주목할 만하다.
“돈으로 하는 기부만 기부가 아니다. 마음의 나눔도 기부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경제적 관점에서만 보면 경기가 나쁠수록 기부를 주저하겠지만, 마음의 관점에선 사는 게 힘들수록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경향이 강했던 게 현실이다. 역사적으로도 국채보상운동부터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까지 나라가 위기에 처할수록 함께 힘을 모으지 않았나. 우리 사회가 점점 삭막해진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이타적인 분들이 많다. 특히 잉여 자산뿐 아니라 내가 가진 조그만 것이라도 기꺼이 나누려는 마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부 문화가 한층 성숙해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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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현민 기자

그는 일각에서 기부를 주저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로 기부 단체의 신뢰성을 꼽는 데 대해서도 “기부 단체 활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생긴 현상으로 본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기부 사업은 단기·중기·장기 사업으로 나뉜다. 예컨대 자연재해 피해를 입은 이재민에게 라면이나 텐트 등 생필품을 공급하는 건 당장 실행해야 하는 단기 사업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들에 대한 심리 치료나 주택 재건 등도 중장기 사업으로 지속해 나가야 한다. 이에 따라 기부 단체들도 후원금을 한 번에 다 쓰지 않고 필요한 단계에 맞춰 나눠 쓰게 되는데, 우리 사회는 당장 기부금을 다 쓰지 않으면 불신이 커지는 경향이 있다.”

황 이사는 그러면서 “모든 기부금이 투명하게 집행되고 있으니 ‘믿어달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며 “물론 기부 단체들도 중장기적 계획과 비전을 제시하는 등 설득력을 높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부자·단체 오해없도록 법 표준화해야

기부하고 싶지만 경제적 여건이 안 돼 어쩔 수 없다는 이들도 적잖다.
“돈이 많아야 기부한다는 편견을 버리는 게 중요하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기부를 실천할 수 있고, 나의 작은 희생이 누군가의 삶엔 큰 힘이 될 수 있다. 소액이라도 꾸준히 후원하는 게 당장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겐 그 무엇보다 소중한 버팀목이 될 거다. 내 주변의 이웃들을 미력하나마 도울 수 있다는 것, 그런 경험이 하나씩 쌓여 나갈 때 우리 사회도 좀 더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황 이사는 “선한 일은 전염성이 강해서 도움을 받은 사람이 잊지 않고 갚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기부하는 주변 사람에 자극받아 따라 하는 학습 효과로 이어지기도 한다”며 “기부 경험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이는 곧 그 사회의 문화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선진국에선 아이가 어릴 때부터 소액이라도 기부하는 습관을 들이게 하고 학교에서 기부에 대한 교육을 중요시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앞으로 개선·보완돼야 할 점이 있다면.
“지난해 기부금품법이 개정되면서 감독·규제 위주였던 기존 정책에서 탈피해 투명성을 높이며 기부 활성화와 건전한 기부 문화 정착에 한발 더 나아갈 수 있게 됐다. 다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모금하는 경우에만 등록하게 돼있는 제도는 여전히 개선 과제로 남아 있다. 기부 문화가 발달한 미국과 영국 등에선 일부 소규모 단체를 제외하곤 모든 모금 단체가 등록해야 하고 지켜야 하는 기본 원칙도 지역에 관계없이 동일하고 명확하다. 반면 우리는 행정법과 세법이 다르고 지역마다 조례도 제각각이다. 결국 중요한 건 투명성과 소통이지 않겠나. 기부자와 단체 사이에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관련법과 조례를 표준화하는 작업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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