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겸재·추사가 반했던 명나라 서화, 한국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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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5대 황제 주첨기(1398~1435)가 1431년 어머니의 장수를 빌며 그린 ‘만년송’. 굵은 덩굴과 무성한 솔잎으로 노송의 생명력을 표현했다. 전체(아래 사진)의 두루마리 가로 길이가 3m가 넘는다. 랴오닝성박물관 소장. [사진 경기도박물관]
가로 3.32m, 세로 45㎝의 긴 두루마리에 나란히 선 소나무 두 그루가 걸렸다. 수백 년 전 붓을 쥔 이는 나무를 수직으로 그리지 않고, 오히려 위아래를 툭 잘라내고 양옆으로 뻗은 가지를 담은 구도로 소나무의 생명력과 웅장한 기상을 표현했다. 이 ‘만년송(萬年松圖卷)’을 그린 화가는 명나라 5대 황제 주첨기(1398~1435). 그가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1431년에 그린 이 그림은 현재 중국 국가문물국 지정 1급 유물(국보) 중 하나다.
이 ‘만년송’ 등 중국 국가 1급 유물 6점을 포함한 명대 걸작 53점이 용인시 경기도박물관에서 오는 3월 6일까지 전시된다. 경기도와 랴오닝성의 자매결연 30주년을 맞이해 여는 특별 전시 ‘명경단청(明境丹靑: 그림 같은 그림)’으로, 국내에 거의 소개된 적 없는 명대 서화를 한 자리에서 볼 드문 기회다. 명대 전기를 대표하는 궁정화가인 대진(1399~1462)과 중기 화단을 주도한 ‘명사대가(명나라 최고의 예술가 4인)’ 심주(1427~1509), 문징명(1470~1559), 당인(1470~1524), 구영(1494~1552) 등의 작품도 왔다.
명대(1368~1644)는 문화 예술 분야에서 눈에 띄는 발전과 혁신이 이뤄져 중국 회화사에서 중요한 시기로 꼽힌다. 황실과 귀족들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화가 대진부터 말기의 거장 동기창(1555~1636)까지 걸출한 화가들이 활약했다. 이를테면, 달마·혜가·승찬·도신·홍인·혜능 등의 모습을 한 화폭에 그린 대진의 ‘여섯 명의 선종 조사(禪宗六祖圖卷)’는 그의 대표적인 인물 산수화다. 랴오닝성박물관의 양용 큐레이터는 이 작품에 대해 “산수화 형식을 완벽하게 유지하면서 고승들의 정신적 풍모까지 생생하게 표현했다”고 소개했다.
경제적으로 번영했던 명대 중기의 회화는 우아하며 함축적이고, 품격을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문인들이 술을 마시며 국화를 감상하는 모습을 묘사한 심주의 ‘분재 국화 감상’은 먹과 색의 변화를 중시한 심주의 뛰어난 예술적 기량을 완벽히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다. 명대 후기 작품 중엔 동기창의 걸작으로 꼽히는 ‘행서로 쓴 칠언율시’ 등 여러 작품을 볼 수 있다.
한편 경기도박물관은 이번 전시를 기념해 지난 6일 ‘명대 서화 예술의 전개와 확산’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이날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 큐레이터 임수아 박사는 “동기창이 조선의 종이를 ‘강산추제도’(클리블랜드 소장)등 다수의 작품에 사용했다”는 내용의 연구를 발표했다.
임 박사는 “2021년 3월 클리블랜드미술관에서 ‘강산추제도’를 원적외선으로 촬영한 결과, 그림 중심 부문에 (조선의) 공물 목록이 적혀 있으며 조선 국왕의 주문방인이 찍힌 것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조공문이 적힌 날짜는 조선 선조 때인 1573년 8월 19일. 그는 “명말 서화가들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높은 취향을 드러내는 데 있어 중요한 수집품 중 하나가 표면이 두껍고 윤이 나는 조선 종이였다”고 덧붙였다.
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은 “명대 서화예술, 특히 시(詩)·서(書)·화(畵)가 한 공간에 일체로 구현되는 동기창의 서화 작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정선·강세황·김홍도·신윤복, 나아가 김정희의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까지 조선 후기 예술의 변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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