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시간끌기 나선 푸틴, ‘미국안’ 검토한다면서 우크라 영토요구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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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평화안을 놓고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우크라이나군 철수와 점령지 영토 인정이라는 기존 요구는 한 치도 거두지 않은 채 협상 여지만 열어놨다는 점에서다. 평화안이 구상되는 동안 러시아는 동부 전선에서 소규모 진격을 이어가고 있다. 전장을 유리하게 만들어 놓고 유럽 안보와 핵군축 등 전후 세계질서까지 염두에 둔 협상을 준비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7일(현지시간)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열린 행사 뒤 러시아 언론과 만나 발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조약 초안 아니다…그래도 협정 토대 될 수 있어”
푸틴 대통령은 27일(현지시간)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열린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정상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평화 구상에 대해 “합의문 초안도 아니다”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향후 협정의 토대로 활용될 수 있다는 데는 동의한다”고 밝혔다. 그리고는 “완성된 평화조약 초안이 아니라 논의가 필요한 ‘질문 목록’에 가깝다”고 강조했다. “거리두기와 수용 가능성을 동시에 시사한 이중 신호”라는 게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평가다.
쟁점의 중심에는 여전히 영토 문제가 자리한다. 푸틴 대통령은 비슈케크 회견에서 “크림반도와 돈바스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는 문제가 미·러 사이의 핵심 협상 의제가 돼야 한다”고 못 박았다. 전쟁 종결 조건에 대해서도 그는 “우크라이나군이 그들이 점령하고 있는 영토에서 떠난다면 우리는 전투행동을 멈출 것”이라며 “그렇지 않을 경우 군사적 수단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CNN은 “러시아가 현재 국제법상 우크라이나 영토의 약 20%를 점령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루한스크 전역과 도네츠크, 헤르손, 자포리자 지역의 일부가 포함된다”며 “일방적으로 병합을 선언한 4개 지역 전체와 크림반도를 두고 우크라이나에 사실상 영토 포기를 요구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크라와 합의 불가”…우크라 패싱, 서방과 직접 협상 의지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지도부의 정통성에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한 대목도 눈여겨볼 만하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계엄령을 이유로 대선을 실시하지 않아 현 우크라이나 지도부는 법적 정당성을 상실했다”며 “이 같은 상황에서 법적으로 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진정으로 중요한 건 오늘의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주요 국제 행위자들이 러시아의 영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점령지와 합병을 선언한 땅을 보장 받는 데 우크라이나를 패싱하고 서방과의 ‘빅딜’을 우선시하겠다는 속내로 풀이된다.
유럽엔 “공격 안 하겠다”, 미국과는 핵 문제까지 큰 판에 올려
푸틴 대통령이 유럽을 향해 일종의 ‘안심 카드’를 꺼내든 것도 이런 의도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그는 “러시아는 유럽을 공격할 의도가 없다”며 “그들이 원한다면 유럽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문서로 남길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8월 15일(현지시간) 미 알래스카주 앵커리지 인근 엘멘도프-리처드슨 합동기지 활주로에 도착한 뒤 악수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 자리에서는 전략무기와 관련된 사안도 거론됐다. 푸틴 대통령은 내년 2월 만료되는 미·러 신전략무기감축조약(New START·뉴스타트)을 언급하며 “미국과 전략적 안정성과 관련된 모든 사안을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며 “다음 주 모스크바를 찾을 예정인 미국 대표단과 협상에서 핵실험 준비와 관련된 주제도 제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 안전 보장 서약, 미·러 핵문제 등을 한꺼번에 꺼낸 건 단순 휴전을 넘어 전후 질서를 다시 짜는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전장·협상장 동시에 돌리며 시간 벌기
러시아가 이처럼 ‘키 플레이어’로 몸값을 높일수록 유럽의 초조감은 커지고 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이 초안을 미국 측 설명이 아닌 언론 기사 헤드라인으로 처음 알았고, 유럽 외교 당국자들은 영토 획정과 제재 해제 문제에 대해 러시아 입장이 지나치게 많이 반영돼있어 놀랐다고 뉴욕타임스(NYT)는 보도했다. NYT는 그러면서 “트럼프 평화안 초안에는 유럽이 사실상 배제됐다”고 지적했다. FT는 “유럽이 뒤늦게 협상에 뛰어들어 초안의 가장 거친 조항을 일부 걷어냈다”면서도 “크림·돈바스 지위와 우크라이나의 군사적 지위, 안보 보장 방식 등 핵심 쟁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보도했다.
그 사이 전장에선 러시아군 꾸준히 진격 중이다. 푸틴 대통령은 도네츠크주 포크로우스크 등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을 포위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CNN은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를 인용해 “러시아가 일부 성과를 냈지만 도네츠크주 전역의 함락이 임박한 건 아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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