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길고양이와 '상생 실험' 나선 아파트 "1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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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경기도 수원의 A 아파트 단지. 평소 주민들의 발길이 자주 닿지 않을 듯한 구석진 단지 외벽 아래 한켠에 성인 팔길이 정도 되는 크기의 네모난 플라스틱 상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상자 아래엔 한기를 막기 위한 플라스틱 받침대가 깔려있었고, 위엔 짙은 회색의 비닐 천이 덮여 있었다.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니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몸을 눕힌 채 쉬고 있었다. 길고양이들을 위한 집이었다.

비가 많이 내린 뒤였지만, 집 안에 있는 고양이의 털은 물에 젖거나 지저분한 흔적이 없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집은 길고양이를 돌보는 이른바 ‘캣맘’들이 무단으로 설치한 게 아닌, 아파트 입주민들과 관리소, 캣맘간의 합의 끝에 설치한 아파트 ‘공식 인증 고양이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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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한 아파트에서 제정한 길고양이 돌봄 가이드라인. 사진 독자 제공

지난해 10월 26일, 해당 아파트 단지 곳곳에 ‘길고양이 돌봄 가이드라인’이라는 제목의 안내문이 붙었다. ‘찐빵이(8)’와 ‘고순이(6)’, ‘도끼(8)’와 ‘순이(5)’ 라는 이름을 가진 고양이 4마리에 대해 아파트 내 서식을 허용하며, ‘캣맘들은 주민들과의 상생을 위해 음식을 제공하고 건강과 청결을 관리해야 한다’와 같은 의무 사항이 담겨 있었다. 혹시나 있을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고양이를 학대하거나 급식소·집 등을 파손할 경우 고발조치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제목은 가이드라인이지만 길고양이와 그들을 돌보는 캣맘, 그리고 입주민들과 관리소 사이 합의 내용을 담은, 일종의 ‘상생 합의문’이었다.

합의문 시행 만 1년이 지난 지난 27일 만난 아파트 입주민대표회의 임모(64) 회장은 “길고양이로 인한 문제점은 줄이고 장점은 극대화한, 가장 좋은 상생 방안이라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전에는 곳곳에 고양이집이 놓여 있어 지저분하다는 민원이 접수되는 등 갈등도 계속 있었다”며 “실제로 위생 문제 등 생활 불편을 야기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라 무분별하게 놓인 고양이집은 치우는 등, (캣맘과 다른 입주민들) 양쪽의 의견을 모두 반영해 갈등의 소지를 최소화하는데 초점을 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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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빵이(8·왼쪽)와 고순이(6·오른쪽). 임 회장은 ″찐빵이는 우리가 처음 입주했을 때부터 살고 있었고, 고순이가 온 뒤 부부가 됐다″고 했다. 사진 독자

실제 가이드라인 시행에 대한 주민들의 만족도도 높았다. 주민 신모(40대)씨는 “길고양이를 돌보는 걸 반대하던 사람들도 급식과 치료, 위생 관리 등의 의무가 부여되니 납득했다”며 “새로 유입되는 고양이가 생기면 다시 방안을 정해보자고 합의까지 된 상태”라고 했다. 아파트 관리소 측 역시 “4마리 모두 온순한 성격으로 주민들로부터 사랑 받고 있고, 아파트에 해를 끼친 적도 없다”며 “새로 이사오는 사람들에게 가이드라인을 배포하는데, 별다른 문제 제기가 나온 적도 없다”고 했다. 임 회장은 “지난 10월 이후 고양이 관련 민원이 싹 사라졌다”며 “얘(고양이)들도 우리 아파트에 산지 8년 정도 돼 이제는 그냥 주민이라고 봐도 된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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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8·왼쪽)와 순이(5·오른쪽). 이 둘 역시 부부고, 찐빵-고순이 커플과도 사이가 좋다고 한다. 사진 독자

갈등 씨앗 된 길고양이…곳곳에서 ‘상생 실험’

길고양이 문제는 전국 곳곳에서 갈등의 씨앗이 되고 있다. “생명이니 돌봐야 한다”는 의견과 “주민들의 쾌적한 생활을 방해한다”는 입장이 거세게 충돌하는 경우가 잦다. 지난달 24일에는 경기 양평의 한 농가에서 이웃이 쏜 화살에 맞은 고양이가 발견되기도 했고, 지난 9월 서울 송파구에서 헬멧을 쓴 남성이 길고양이를 잡아 바닥에 수차례 내려치는 학대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캣맘을 상대로 욕을 하거나 폭력을 가하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이처럼 길고양이 문제가 사회적 갈등으로 번지고 있지만 마땅한 해법은 없는 상황에서, A 아파트 단지처럼 각 지자체나 주거 단지 별로 갈등 해결 실험에 나서는 곳들이 생겨나며 주목을 끌고 있다. 지난 7월 충북 충주의 한 아파트 단지는 시에서 제시한 급식소 위생관리 기준을 수용하고 길고양이를 위한 급식소 5곳을 설치하는데 합의했다. 또 대전 동구는 지난 23일 사찰과 공공기관 건물 등 3곳에 길고양이 급식소를 설치하고, 캣맘들로 이루어진 봉사자들이 청결 관리 등을 도맡게 해 주민 생활환경 개선을 도모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실험이 장기간 효과를 거둘 수 있다면 기존의 제도적 허점을 보완하는 좋은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변호사들’ 공보이사를 맡고 있는 박찬민 변호사는 “길고양이의 경우 소유자가 없다 보니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묻기가 어려운데, 주민들 간 합의로 가이드라인을 정하면 일정 정도 구속력이 생겨 잘 지켜질 가능성이 커질 것 같다”며 “돌보미(캣맘)들 가운데 밥만 주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문제가 되는데, 관리 의무 등 책임감을 부여해 보완했다는 점에서 실제 다른 지역에 적용하기 좋은 모델로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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