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내 삶의 끝, 누군가에겐 시작이 되길"…그들의 마지막 약속 [유산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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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유산이 될 아파트를 사회에 기부하기로 서약한 정인조 씨. 변선구 기자
경기도 부천에 거주하는 정인조(74)씨는 최근 본인이 세상을 떠나면 자녀들에 물려줄 유산의 20%에 해당하는 아파트 한 채를 신탁을 통해 지역 시민단체에 기부하기로 했다. “재산을 정리하기엔 이른 나이지만, 우리 세대가 만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어 미리 결심했다”면서다.
1977년부터 직장생활을 하다 IMF 외환위기 때 퇴직해 창업에 나선 그는 현재 직원 100명이 넘는 중소기업의 대표가 됐다. 학창시절 가난 탓에 상고에 가려 했지만, 선생님의 지원과 가족의 희생 덕에 서울대에 진학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받은 도움을 평생에 걸쳐 사회에 돌려줬다. 살면서 번 수입의 40% 정도를 기부한 것. 정씨는 “주변 도움을 받아 1970년대 중반에 사회로 나왔는데, 그 시기엔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면 성공의 길이 열려있었다”며 “우리 사회와 주변 많은 분의 도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기 때문에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라고 했다.
유산 일부를 포기해야만 하는 가족들 역시 “그것이 아버지 삶의 연장선”이란 말과 함께 선뜻 그의 결심을 응원해줬다고 한다. 그가 내기로 약정한 아파트 판매금은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활동 지원금과 기후위기 대응 기금 등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장세정(가운데)씨가 유산기부 서약서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월드비전
정씨만이 아니다. 유산기부를 결심한 사람들은 “살면서 누린 것들을 죽은 이후에도 나누고 싶다”고 했고, “내 죽음이 곧 누군가의 삶의 밑거름이 되고 사회를 바꾸는 토양이 됐으면 한다”고도 했다. 평소에도 봉사와 기부를 통해 그 가치를 가족들과 나눈 경우가 많았고, 덕분에 유산 일부를 양보해야 하는 가족들 역시 대부분 그 뜻에 동의해 줬다. ‘선한 의지’와 ‘선한 행동’이 삶 내내 반복되고 가족 안에서 공유되며, 죽음 이후까지도 이어지게 된 것이다.
초등학생 딸 둘을 키우고 있는 장세정(44)씨 역시 사망보험금 1억원을 기부하기로 했다. 평소에도 아이들과 함께 연탄 나눔 등 봉사활동을 함께 해 왔다는 장씨는 “기부하던 시민단체의 소셜미디어(SNS)를 보다가 아프리카에서 소녀들이 염소 3마리에 팔려 가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사망보험금을 보내주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사망한 다음 받게 될 보험금을 기부하는 일에는 가족들의 동의도 반드시 필요했다. 장씨는 “유산이든 사망보험금이든 당연히 가족들에게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지 않나. 이걸 기부하겠다는 얘기를 하자 처음엔 남편이 당황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돈이라는 물질보다는 이 세상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교훈을 물려주고 싶다고 설득하니 동의해줬다”고 전했다.
“어떻게 써야 내 유산이 더 가치 있을까 항상 고민하다 찾은 답”
김명희(왼쪽) 장신대 교수가 16일 오전 서울 수서동 밀알복지재단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강정현 기자.
자녀가 없는 김명희(71)·김성환(77) 부부는 최근 유산을 어떻게 더 가치 있게 쓸 수 있을지 고민하다 전 재산을 나눠 곳곳에 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평생 건축과 교수로 일하며 탄자니아 오지 등에 학교를 짓는 봉사를 해온 김명희씨는 “학교 건설 봉사를 하며 어려운 사람 중에도 더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고, 이주민 여성과 시청각 중복장애인 등에 관심이 생겼다”며 “이들 중 일부는 상담사들도 피하는 등 사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는 곳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내가 남기고 가는 것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이들 부부는 “우리는 자녀는 없어도 형제자매와 조카들은 많은데, 전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이미 통보했다”며 “대학 갈 때까지 용돈도 줬고, 교육비도 지원해줬으니 그만하면 되지 않았냐고 하니 가족들도 ‘고모랑 고모부 돈인데 뜻대로 하라’며 응원해줬다”고 덧붙였다. 부부의 유산은 김명희씨가 재직했던 학교와 이주민 여성, 시청각 중복장애인 등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
내 아이는 없어도…“아이가 곧 미래, 불공평한 삶 내몰리지 않길”
김경아씨가 유산기부를 약정한 뒤 받은 감사패와 감사장. 사진 독자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린아이 생명을 구해주세요(When you leave this world, Save the Children)”. 영국 세이브더칠드런이 2013년 유산기부 캠페인을 진행하며 내놓은 메시지다. 전남 목포에서 사업을 하는 1인 가구 김경아(63)씨 역시 이 같은 마음으로 최근 본인 소유의 2억원대 아파트를 아동복지 전문기관에 기부하기로 했다. 김씨는 “가까운 사람한테 사기를 당해 모은 돈을 다 잃어보니 ‘좋은 일이라도 할걸’하는 후회가 들었다”며 “어릴 때 상황이 어려워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이런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줄었으면 해 기부를 결심했다”고 했다. 이어 “나는 아이가 없지만, 결국 아이들이 미래 아니냐”며 “(아이들이) 이 나라를 지킬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기부를 결심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박연향씨가 자신이 후원한 해외 아동들과 만나 찍은 사진. 사진 독자
역시 1인가구인 박연향(70)씨는 최근 사망보험금 5000만원의 상속자를 기아대책기구로 지정했다. 박씨는 “아프리카에 있는 아이 한명을 18세까지 후원한 게 시작이었다”며 “유산 상속자로 기아대책기구를 지정한 것도 이왕이면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서였다. 한국에도 어려운 아동이 많지만,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조금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그의 유산은 아프리카 등지에 있는 아이들의 교육 지원에 쓰일 예정이다.
이들은 유산기부를 통해 본인들의 삶이 더 풍성해졌다고 입을 모았다. 김명희씨 부부는 “나이가 있어 종종 아프곤 하는데, 그럴 때도 ‘내가 죽으면 남을 도울 수 있게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죽음이 마냥 두렵지 않다”고 했다. 장세정씨는 “죽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적어도 유산기부를 통해 내 삶이 멈춰도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이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돼 행복하다”고 했다.
개인적 보람을 넘어, 사회적 차원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도 크다. 정인조씨는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상당한 부를 갖고 있다. 우리 사회가 초고령사회로 들어가고 있는데, 이분들이 사회공헌을 하게 되면 삶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사회적으로도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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