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조선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 일대가 꼬리곰탕으로 유명했던 이유[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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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학로
안대회 지음
문학동네
반촌(泮村)은 반궁(泮宮)이라고도 불리던 성균관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성균관이 조선시대 유일한 고등교육기관이었던 만큼 반촌 역시 유일한 ‘학교 마을’로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조선 초부터 교육을 숭상하는 구역이라는 ‘숭교방(崇敎坊)’ 명칭이 부여된 교육특구였다. 오늘날 서울 종로구 명륜동과 혜화동 일대다.
18세기의 지도 '한양도성도'. 개인 소장. 성균관 일대의 물길이 잘 묘사되어 있다. 위 물길을 기준으로 서반촌과 동반촌이 표기되어 있고, 반수와 홍덕동천 위에 관기교, 사락교, 광례료, 응란교, 장경교 등 다리가 표시되어 있다. 그중 장경교는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세워진 가장 큰 다리이다. 관기교 등 세 개의 다리는 1782년에 건축하였다. [사진 문학동네]
그곳으로 20년 넘게 출퇴근한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가 반촌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터다. 오랜 시간 발품 판 현장답사와 손품 판 자료수집을 통해 그는 독자들을 책 제목처럼 조선의 대학로였던 반촌으로의 시간여행에 초대한다.
출발은 성균관에서부터지만 저자의 더 큰 관심은 반촌과 그곳 사람들, 즉 반인이다. 500년 된 은행나무와 명륜당, 대성전, 수복청 등 오늘날 남아있는 장소를 넘어 성대 도서관 주변에 있던 소나무숲 벽송정, 후문 쪽에 있던 두 라이벌 동네 포동과 송동, 반촌을 둘로 나누었던 반수(泮水) 등 지금은 사라진 풍경들을 눈앞에 펼쳐보인다.

유생과 수복의 옷차림새.『정의사호성록 』'호성록십이도' 중 '식당을 다시 열다復設食堂' 그림.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소장. 정(鄭)과 朴(박)이 쓴 두건은 수복이 쓰는 모자(전자건)이고, 대청에 앉아 있는 검은 두건(민자건)을 쓴 이들은 유생이다. [사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
반인은 대부분 고려 후기의 유학자 안향이 성균관에 바친 노비 100명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은 공노비 신분으로 반촌에 거주하며 성균관 유생 보필과 문묘 제례 수발 등 성균관의 모든 잡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면천과 거주 이전이 허용되지 않는 대신 각종 부역을 면제받았다. 그러다보니 수가 크게 늘어 정종 때는 800여 가구에 4000여명에 이르렀다.
반촌이 번성한 것은 역설적으로 성균관 재정이 열악해지면서부터. 임진왜란 후 전액 장학생인 성균관 유생들의 식비, 교재비와 문묘 제사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워지면서 반인들의 경제활동에 기대게 된 까닭이다. 이를 위해 반촌에 준 특혜 중 대표적인 것이 독점적으로 소를 도축해 고기를 판매하는 현방 운영권이다. 반인들은 음식을 만들어 팔기도 했는데, 반촌의 꼬리곰탕은 조선 후기 한양 주민들이 줄서서 먹는 인기음식이었다고 한다.
'태평성시도', 작자 미상,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번화한 도회지 풍경을 중국풍으로 그린 9폭의 기록화로 18세기 한양 시장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위의 그림은 3폭과 4폭에 걸쳐 있는 장면 일부로 식료품과 식당이 있는 거리를 묘사한다. 왼쪽의 현방에서는 붉은색의 소고기를 걸어놓고 고기를 썰어 판매중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문묘와 도축,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당연히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반촌은 형리가 들어갈 수 없다는 치외법권까지 누리고 있어 불법 도축 등 범법행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따라서 현방의 이익을 보호할 필요가 있는 성균관 대사성과 법을 수호하려는 형조판서, 한성판윤의 갈등이 19세기까지 끊이지 않았음을 책은 예시한다.
반촌은 또한 지방 유생들의 베이스캠프 역할도 했다. 과거 응시생은 물론 벼슬을 하러 온 지방 출신 관리들도 반촌에 머물 집을 정해두었다. 일종의 하숙인 셈인데, 하숙집 주인인 반주인(泮主人)은 숙식은 물론 각종 편의와 정보까지 제공했다. 심지어 유생이 받아야 할 징계를 대신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유생과 반주인은 양반과 노비라는 신분 차이가 있었지만 주종관계라기보다 계약관계였으며, 오히려 반주인이 유생들의 후견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반주인이 유생들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것은 일종의 투자였다. 자신이 모시던 유생이 급제해 지방 수령으로 나가면 들어간 비용의 몇 배나 되는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주인이 이권 청탁을 하거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보복으로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는 경우까지 있었다.
『태학지』'반궁도'. 18세기 성균관의 구조를 그린 그림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동반수에는 성균관의 입구로 인식된 향석교를 비롯한 세 개의 다리가, 서반수에는 서반수교가 놓여 있다. [사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서구식 교육의 도입과 함께 성균관 위상이 추락하면서 반촌도 소멸돼갔다. 반인들 스스로 학교를 지어 교육특구의 명맥을 유지하려고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일제강점기의 기사에서 반인은 그저 소 도축업자를 칭하는 대명사 정도로 설명되고 있다.
이처럼 이 책은 반인이라는 특수집단과 그들이 모여살던 일종의 게토였던 반촌의 흥망성쇠를 입체적으로 다룬다. 책을 읽은 독자라면 중국 사신도 터가 좋아 인재가 배출되는 땅이라 칭찬했다던 성균관과 명륜동 일대를 걸어보며 아는 이에게만 보이는 문명의 기운을 느껴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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