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쓰는' 것 아니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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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의 복화술
김혜순 지음
문학과지성사
시 낭송이 끝나자 한 독자가 다가왔다. “이 시집의 주제가 뭐예요?” 짜증이 묻어났다. 시인은 답했다. “나는 이 시의 주제를 언어로 지시할 수가 없어요. 주제가 내 시를 끌고 가게 하고 싶지 않아요. 죽은 엄마를 내 시 속에 안치하려고 한 건 아닐까요?“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나는 엄마를 묘사하지 않아요. 엄마는 나의 시적 대상이 아니에요. 나는 엄마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엄마와 같이, 같은 것을 말해요. (중략) 나는 부서져버린 엄마를, 사막이 된 엄마를 일으키려 해요. 순간의 현전으로 일으켜 세우려 해요. 나는 엄마의 사막에서 미세한 세부를 채집하려는 것처럼 ‘시해요’.”
김혜순 시인. 2022년 시집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출간 때 모습이다. [사진 문학과지성사]
‘시해요’. 그의 시는 무언가에 대하여 ‘쓰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이렇게도 썼다. “장르에도 기득권이라는 게 있다. 소설을 쓰면서 허구라고 주장하는 것, 시를 쓰면서 암시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 두 가지를 버리면 해방이다.” “시는 동일한 자아가 한 가지 정서와 논리를 가지고 진행하는 산문과 다르다. 시는 어쩌면 글쓰기를 거부하는 장르인지도 모른다.” “시는 아직 언어화되어본 적 없는 것,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을 보이고, 들리게 하는 목소리다. 이 시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 거야? 네 이데올로기가 뭐야? 네 정체성이 뭐야? 하는 독자를 더욱 교란하려고 시는 써진다.”
최근 국제 무대에서 더욱 각광받고 있는 김혜순 시인의 시론집 『공중의 복화술』이 나왔다. 한국인 최초로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2019ㆍ『죽음의 자서전』),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2024ㆍ 『날개 환상통』), 독일 국제문학상(2025ㆍ 『죽음의 자서전』) 등을 수상하며 K-문학의 성가를 높이고 있는 그다. 여성 시의 전범이라는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날로 급진적인 언어 미학을 갱신해온 시인의 창작 세계를 그의 목소리로 직접 들을 수 있다. 2020년 이후 문예지 ‘악스트(Axt)’ 연재 글과 국내외 강연ㆍ기고문을 묶었다. 『날개 환상통』 『죽음의 자서전』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등 김혜순 시 세계의 정점인 ‘죽음’ 3부작을 중심으로 목소리, 복화술, 상실과 죽음, 딸꾹질, 시간과 사이, 고백과 다시쓰기, 여성주의 등 핵심 키워드들을 풀어냈다.
책 제목이기도 한 ‘공중의 복화술’은 시집 『날개 환상통 』에 작가 에세이로 수록된 글이다. 앞서 2012년 런던올림픽 기간 중 열린 국제 시 낭송 행사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던 시인은, 한 아프리카 시인이 혀 끝으로 내는 새소리로 시를 대신하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김혜순 시인. [사진 문학과지성사]
‘Tongueless Mother Tongue(혀 없는 모국어)’는 2023년 베를린 시 축제 때 기조연설문이다. 연설 직후 “현대문학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시학 텍스트 가운데 하나”라는 외신의 찬사가 나왔다. 이 글에서 시인은 유신독재 말기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며 검열 당국에 불려갔던 경험을 털어놓는다. 권력에 말과 혀를 빼앗긴 시인은 침묵, 한숨, 딸꾹질, 신음 같은 소거된 소리들에 귀 기울이게 된다. “죽임을 당한 혀가 잃어버린 것들을 향해 가는 길목에, 혹은 혀가 추방되어 쫓겨나는 그 가장자리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린다. 시인은 이 목소리를 들을 때만 시인이다.” 시인은 형사에게 뺨도 맞았는데, 뺨 한 대에 한 편씩 일곱 편의 시를 썼다. 그중 여섯 편이 훗날 시집 『어느 별의 지옥』에 실렸다.
‘문학은 어디서 시작할까?’가 책의 부제다. 시인은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으며 누구나 자신 안에 싱싱한 새로움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서” 책을 썼다고 밝혔다. “문학의 새로움이란 곧 글 쓰는 자신이며, 인간 각자가 경험하고, 품고 있는 감정과 생각, 그 모든 것이 신선한 것”이니, “생각과 감각하기를 고정관념에 함몰시키지 말라”는 것이 시인의 조언이다.
“나의 시 쓰기의 기반은 죽음이다. 부재가 반, 존재가 반인 그런 시 쓰기. 존재를 부재에, 부재를 존재에 투척하는 글쓰기. 그리하여 죽음에 안겨있는 시인. 아무것도 아닌 것에 안긴 아무것도 아닌 시인.” 산문집이지만 유려한 시적 리듬감이 여전하다. 독보적 사유와 빛나는 문장으로, 공들인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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