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자연 그대로의 자연은 아니지만...자연사박물관의 흥미로운 이면[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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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박물관이 세계를 구하는 법
잭 애슈비 지음
제효영 옮김
김영사

두어 달 전, 어쩌다 조카를 데리고 남산 과학관을 찾았다. 시간을 때울 얄팍한 심산이었는데, 뜻밖에 기억 저편에 묻혀 있던 박제를 보았다. 과학관이 지금의 서울시 선관위 건물에 있던 때 보던 것들이다. 어린 마음에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보다가 어느새 추레하게 느껴져 발길을 끊었었다. 다시 본 옛 친구들은 여전히 어색한 태가 났지만, 수십년 전과 달리 무언가를 더 말하는 듯했다. 나로서는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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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최의 박물관 박제사' 찰스 윌슨 필은 새로운 전시 방식을 선도했다. 그는 박제된 새를 전시하면서 배경에 풍경을 그려넣었고, 살아 있는 동물처럼 무언가를 하는 모습으로 연출했다. [사진 김영사]

때마침 나온 『자연사박물관이 세계를 구하는 법』은 박제 앞에서 느꼈던 막연한 느낌이 단순한 착시만은 아니라고 위로해준다. 나아가 그 느낌 배후에 놓인 복잡한 층위의 세계로 독자의 흥미를 이끈다. 글쓴이는 한창 활동적인 40대 동물학자로, 케임브리지대 동물학박물관 부관장을 맡고 있다. 그는 관람객이 보는 전시실 이면에서 작동하는 방대한 네트워크를 차분히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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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진짜 골격으로 제작된 '수'는 지금껏 발견된 공룡 화석 중 형태가 가장 완전한 표본으로, 현재 미국 시카고의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위키커먼즈.

글쓴이에 따르면 자연사박물관은 묘한 곳이다. 문명 사회의 성취를 상징하면서도, 자연과 생태계를 기록하는 ‘자연적’ 장소처럼 보이지만, 결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세계 어디에서나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공룡 골격이나 고래 전시는 상당수가 복제품이거나, 실제 화석과 복제품이 뒤섞인 결과물이다. 심지어는 다른 종의 화석으로 ‘보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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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이 생물학자로 활동하던 초기에 수집한 곤충 표본. 현재 케임브리지대학교 동물학박물관ㅇ 보관되어 있다. 대학생 시절 다윈은 강의를 빼먹고 딱정벌레를 채집하러 다닌 적이 많았다고 한다.ⓒ University of Cambridge/Julieta Sarmiento Photography

반대로, 언뜻 평범해 보이는 벌레나 식물 표본들이 과학적으로 더 중요할 때도 있지만, 대개 수장고의 어둠 속에 머문다.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전시할지는 생태학적 중요성이나 과학적 균형보다는, 오래된 전통과 식민지 시대의 관성, 그리고 큐레이터 개인의 취향에 의해 좌우되곤 한다. 무엇보다도 관람객의 관심을 사로잡을 필요가 꾸준한 압력으로 작용한다.

특정 공룡 뼈대를 높이 일어선 자세로 전시하는지, 아니면 몸을 앞뒤로 쭉 뻗은 형태로 보여주는지의 변화는 공룡 연구의 발달 덕분이라고 차라리 위안할 수 있다. 반면 포유류 암컷 표본들을 너무 적게, 그것도 종종 굴복하는 자세로 전시한다든지, 원주민 수집가들의 역할과 기여를 무시한다든지 하는 당대 사회의 편향이 그대로 반영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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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컷이 수컷에게 몸을 한껏 낮춘 모습으로 묘사된 1780년대의 중국 금계 표본.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기증한 것을 찰스 윌슨 필이 박제한 것으로, 박제 방식의 동향을 보여주는 초창기 예시이다. ⓒ President and Fellows of Harvard College

문제는 한때의 잘못에 그치지 않고, 왜곡된 이미지를 ‘자연’에 부여하고 이를 재생산한다는 점. 영장류 수컷 박제들이 대부분 음경골이 제거되었다는 점은 작은 일화에 불과하다. 동성 간 성행동이 비자연적이라는 잘못된 믿음은, 박물관 측 자체검열 때문에 강화된 측면도 있다(비자연적이기 때문에 금해야 한다거나 자연적이기 때문에 장려해야 한다는 논증은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점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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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벤저민 워터하우스 호킨스가 1850년대 런던 남부 그리스털팰리스에 전시했던 이구아노돈과 하드로사우루스의 화석 모형을 묘사한 그림. 실물 크기로 만들어진 그의 모형들은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공룡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첫 단추가 되었다.[사진 김영사]

이런 오류와 편향에도 불구하고 자연사박물관은 과거를 붙들고 있는 덕분에 미래를 구하는 존재란다. 전 세계 자연사박물관은 10억 점 이상의 표본을 관리하는데, 언제 어디서 무엇이 수집되었는지 비교하면 인간 활동과 기후 변화로 인해 서식지가 어떻게, 왜 이동했는지 이해하고, 앞으로 어디에서 생존이 가능할지 가늠할 수도 있다.

또 물리적 표본 자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데이터를 품고 있다. 핀으로 꽂아 놓은 벌 표본에 묻은 꽃가루는 당시 그 지역에 어떤 식물이 살았는지 알려준다. 박제된 새의 깃털에 달라붙은 먼지와 오염 물질은 과거의 환경오염을 추적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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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의 지원센테에는 수많은 고래 골격표본이 보관된 수장고 있다. 왼쪽 바닥에 천장 가까이 솟아 있는 거대한 고래 머리뼈가 보인다. [사진 김영사]

감탄스러운 점은 글쓴이가 자연사박물관을 감정적으로 힐난하지 않고, 차분히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는 점이다. 또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지식들 사이에 생각해볼 거리가 스며들어 있다. 중립적인 것처럼 제시되는 이야기들에서 왜곡과 편향을 피할 수 없다면 이야기꾼(자연사학자와 학예사)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진실에 좀 더 다가가는 길일 것이라든지, 자연과 문화의 구별은 그때그때 임의적으로 오락가락해온 것이라든지. 박물관을 넘어 과학과 자연, 과학과 인간의 관계를 널리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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