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심리학 이전의 심리학자, 인간 심리 꿰뚫은 거장 셰익스피어[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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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심리학
필립 G 짐바도, 로버트 L 존슨 지음
배동근 옮김
아르테
셰익스피어를 심리학으로 들여다본다고? 또? 왜? 책을 받아들고 처음 든 생각이 그랬다. 프로이트 이래로 어지간한 학자들이 한 번쯤은 다 해본 작업 아닌가. 『설득의 심리학』 저자 로버트 치알디니 교수도 그랬나 보다. 추천사에 이렇게 썼다. “나는 셰익스피어와 심리학 사이의 모든 유의미한 연결고리가 이미 다 밝혀졌다고 믿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초상화. 그와 동시대 인물이던 존 테일러가 셰익스피어를 직접 보며 그렸던 것으로 여겨진다. [사진 아르테]
두 명의 저자도 이런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다. 프롤로그 외에 책 본문의 10분 1에 달하는 긴 서문을 자신 없는 말투로(뒤로 가면서 조금씩 힘을 찾기는 한다) 변명처럼 늘어놓는다. 정작 책의 목표는 프롤로그에 있다. “셰익스피어가 인간의 마음 속 움직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살펴본다”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이 인간 심리를 셰익스피어 희곡 속 인물에 빗대 설명했다면, 저자들은 아예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들어가 거기 포진하고 있는 심리현상들을 짚어내겠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셰익스피어 심리학의 끝판왕이 되겠다는 포부다.
이를 위해 두 사람은 38편에 달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전집을 낱낱이 읽고, 그것들이 “이야기라는 외피를 쓰고 있지만 인간의 감춰진 마음 속으로 환한 창문을 낸 사례 연구”라는 결론을 얻는다. 엘리자베스 시대 관객들이 셰익스피어의 작품만큼 “무대에서 공공연히 자신의 정신상태를 드러내는 인물들의 대사”를 듣는 경우는 드물었다.

2006년 4월 23일 아흔 명의 화가가 캔버스의 한 부분씩을 맡아 그린 셰익스피어 초상화가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의 로열 셰익스피어 극장 벽에 걸린 모습, [사진 아르테]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마찬가지다. 리처드 3세보다 더 절묘하게 사이코패스를 묘사한 경우는 없고, 리어왕보다 더 가슴 아프게 인지저하증(치매) 노인을 형상화한 경우는 없으며, 맥베스 부인보다 더 강박장애를 적나라하게 그려낸 경우는 없다는 게 저자들의 생각이다. 심리학이라는 학문 분야는 고사하고 그런 단어조차 없던 시절에 셰익스피어는 이미 심리학자였던 것이다.
특히 희곡 『잣대엔 잣대로』는 저자 중 한 명인 필립 짐바도 교수의 그 유명한 스탠퍼드 감옥 실험과 놀랄 만큼의 유사성을 보인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선량한 사람도 권력을 행사할 기회가 생기면 사악해질 수 있다는 결과 말이다.
영국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 있는 셰익스피어 생가이자 그의 어린 시절 집 전경. 올해 2월 촬영된 모습이다. [로이터=연합뉴스]
더욱 놀라운 것은 셰익스피어가 몇 세기 뒤에야 신경과학자들이 뇌스캔 도구를 사용해 확인하게 될 뇌의 작동방식에 대해 직관적 통찰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례로 2000개 이상의 신조어를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셰익스피어는 명사 ‘아내(wife)’를 동사인 ‘아내를 얻었다(wived)’로 쓰기도 했다. 오늘날 언어학자들이 ‘기능전환’이라 부르는 것인데, 뇌스캔 실험 결과 기능전환된 단어를 들을 때 피실험자의 신경활동이 더 고조됐다. 셰익스피어가 “문법적 모험을 시도함으로써 연극 대사의 의미를 완성하는데 관객들이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유도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책은 셰익스피어와 현대 심리학이 공유하고 있는 네 가지 쟁점, 즉 유전 대 환경, 본성 대 상황, 의식 대 무의식, 이성 대 감정의 4부로 나눠 다뤄진다. 이 과정에서 저자들은 그동안 심리학과 문학비평이 셰익스피어와 그의 희곡 인물들을 지나치게 정신분석학적 틀에 가둔 채 분석해왔음을 비판한다. 프로이트가 햄릿이 오이디푸스콤플렉스에 시달렸다고 분석한 이후 비롯된 현상인데, 저자들은 “셰익스피어가 무의식에 대한 프로이트적 모델을 염두에 두었다는 징후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보다는 직관적 무의식과 이성적 사고의 이중 체계를 설명한 현대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과 조너선 하이트의 이론들이 셰익스피어의 사고 체계와 더욱 가깝다고 말한다.
1896년 미국 화가 조지 헨리 홀이 그린 셰익스피어. [사진 아르테]
치알디니 교수가 자신의 오판을 인정할 만큼, 셰익스피어의 심리학 지평을 종횡무진 확대해나가던 저자들은 다시 겸손해져 셰익스피어가 심리학만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의 본성을 거울에 비추는 문학과 음악·미술은 물론, 정치학·언어학·역사·철학·종교 등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 또한 셰익스피어의 작품 세계와 연결돼있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이 책은 심리학보다 셰익스피어를 다시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데, 같은 생각이 들었다면 셰익스피어를 다시 읽기 전 이 책을 일독하는 것도 좋겠다. 책에 삽입된 다양한 셰익스피어의 초상만큼이나 더욱 새로운 셰익스피어를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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