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물을 물로 보지 마라…석유보다 무서운 ‘워터 워’
-
4회 연결
본문
중동 정세가 요동치며 ‘물’이 또다른 충돌의 근원지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2월말 미국-이란 전쟁 발발 이후 이란이 바닷물을 식수·생활용수로 바꾸는 걸프국의 해수 담수화 시설을 거듭 위협하며 수자원이 전장의 변수로 부상한 탓이다. 기후 위기와 산업 구조 변화로 세계 각지의 물 갈등이 심화한 상황에서 전쟁이 그 불씨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우디아라비아 라스알카이르 산업단지에 위치한 담수화 플랜트 복합단지 전경. 사진 다르 엔지니어링 홈페이지 캡처
유엔대학교 물·환경·보건연구소(UNU INWEH, UN 산하기관)가 올 초 발표한 보고서 ‘글로벌 물 파산’에 따르면 전 세계 물 관련 분쟁은 2010년 20건에서 2024년 400건 이상으로 급증했다. 물의 가치는 치솟고 있다. 세계자연기금(WWF)은 “현재 물과 담수 생태계 가치는 58조 달러(약 8경5400조원)로 전 세계 GDP의 약 60%인데 비중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고 밝혔다. 첨단기술에 국가의 명운이 달린 시대에, 가장 기본 자원인 물이 전략·안보 변수로 격상된 것이다.
물 분쟁 배경에는 기후위기
물 부족이 심각한 중동 지역. 지난달 26일 장기간의 가뭄 끝에 비가 내린 이라크 남부 한 습지의 모습이다. AFP=연합뉴스
분쟁이 늘어난 배경에는 기후위기로 인한 물 부족이 있다. 빙하가 녹고 극심한 가뭄과 폭우가 번갈아 발생하는 일이 늘며 전 세계 인구의 75%가 물에 허덕이고 있다. 칠리지 마르왈라 유엔 사무차장은 “물 부족이 이주·분쟁의 주요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물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물이 곧 무기가 된다. 이란이 걸프국 담수화 시설을 타깃 삼은 것도, 이 지역 인구 80%가 물 스트레스를 겪을 만큼 수자원이 귀해서다. 특히 걸프협력회의(GCC) 6개국은 전 세계 해수 담수화 용량의 약 60%를 차지한다. 쿠웨이트는 식수의 90%, 오만은 86%, 사우디아라비아는 70%를 담수화 시설에 기댄다. 미 중앙정보국(CIA)이 1980년대부터 해당 인프라 공격을 지적해왔다. 기후변화로 지하수 수질이 악화하며 담수 인프라에 의지하는 비중이 늘면서 “물 전쟁이 수백만 명의 생활 기반을 즉각 위협할 것”(뉴욕타임스)이란 경고마저 나왔다.
반면 이란은 강과 댐이 많아 상대적으로 담수화 인프라에 대한 의존도가 낮다. 6년간 이어진 극심한 가뭄으로 반정부 시위까지 겪은 이란이 물의 전략적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점도 ‘수도꼭지’를 위협하는 데 작용했다. 지난 3월 이란과 바레인이 각각 담수화 시설 일부를 공격 받았지만, 바레인에서 더 큰 공포에 떤 이유다. 이번 전쟁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지난달 연설에서 대놓고 “다음 전쟁은 ‘물 전쟁’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영옥 기자
지정학적 불안정성 커지며 분쟁 자극
세계 곳곳에서 지정학적 불안정성이 커지고 있는 것도 관련 분쟁을 자극하고 있다. 강대국들이 주변국을 압박하는 도구로 수자원을 활용하고 있어서다. 중국이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 상류에 댐을 잔뜩 짓고 이들 국가를 흔드는 식이다. 태국·베트남 등은 국력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 데다 하류에 위치한 탓에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최근엔 오랜 앙숙인 인도와 파키스탄이 맞붙었다. 지난달 24일 파키스탄은 인도가 수자원을 무기화한다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 개입을 요청했다. “인도가 물과 관련된 강압적 조치를 자제할 것을 촉구한다”면서다.
발단은 지난해 4월이었다. 인도 카슈미르에서 파키스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총기 테러로 26명이 숨지자, 인도 정부가 히말라야에서 발원해 자국 북부를 지나 파키스탄으로 흐르는 체나브강(인더스강 지류) 물길을 막았다. 이후에도 댐에 물을 가두거나 대량 방류하는 방식으로 파키스탄을 압박했다. 파키스탄 측은 수자원을 공정하게 분배하기로 한 ‘인더스강 조약’을 어겼다며 비판했지만, 인구·경제·군사력 등에서 압도적으로 국력이 센 인도가 상류를 틀어쥐고 흔들자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지난해 9월 파키스탄에서 홍수로 침수된 도로의 모습. 파키스탄 정부는 인도가 상류 댐의 물을 방류해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비난했다. EPA=연합뉴스
포린폴리시(FP)는 “카슈미르 분쟁 이후 양국 관계가 악화하며 인도가 물을 공유자원이 아니라 ‘전략자산’으로 인식하게 됐다”며 “수력발전을 명분으로 수자원을 지정학적 도구로 삼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AI 등 첨단기술 경쟁이 기름 부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분쟁의 불씨에 기름을 부은 건 첨단기술 경쟁이다. 인공지능(AI)을 둘러싼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여기엔 엄청난 물이 필요하다. AI 데이터센터에선 서버를 식히기 위해 냉각수를 쓰고, 반도체·배터리 업체 역시 냉각·세척 등에 막대한 물을 쓴다. 대형 데이터센터의 경우 매일 인구 5만명 도시 만큼 물을 쓴다는 분석(링컨인스티튜트)이 나올 정도다. 구글 등 빅테크들이 물 확보에 비상이 걸린 이유다.
세계 양대 인구대국인 중국과 인도는 이미 이 문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두 국가는 각각 자국의 댐 프로젝트를 수력발전을 넘어 국가 주도 AI 사업의 일환으로 보고 추진 중인데, 이로 인해 국경이 맞닿은 곳에서 부딪친 것이다.
상류를 틀어쥐려는 중국에 맞서 인도 정부 역시 아루나찰프라데시주 등에서 초대형 댐 건설 계획을 속속 내놓고 있다. AFP=연합뉴스
시작은 중국이 했다. 지난해 7월 티베트자치구에서 인도로 흐르는 얄룽창포강(중국명 야루짱부강, 인도명 브라마푸트라강)에 세계 최대 댐 착공에 나선 것이다. 인도는 중국이 한꺼번에 물을 방류하는 등 댐을 무기화할 수 있다며, 영유권 다툼이 있는 아루나찰프라데시 지역에 댐 10여 개를 짓겠다고 맞불을 놨다. “중국이 상류 댐을 무기화할 경우를 대비할 안전판”(아루나찰프라데시 주정부)이라면서다.
싱크탱크 동아시아포럼은 “이 강이 ‘에너지·데이터 전장’이 됐다”며 “수력 발전을 넘어 데이터 주권까지 맞물린 지정학적 분쟁이 된 모습”이라고 분석했다.
미국과 멕시코도 최근 부딪쳤다. 미국에서 발원해 양국 국경을 따라 흐르는 리오그란데강을 두고서다. 서로의 지형적 필요에 따라 멕시코가 자국으로 들어온 이 강물을 미국으로 보내주는 대신, 다른 지역의 강물을 받기로 한 일종의 ‘물 교환 협정’(1944년 수자원 협정)이 문제가 됐다. 멕시코에서 가뭄과 산업용수 수요 급증으로 강물을 보내지 못하자 이 강에 닿아있는 텍사스주가 즉각 타격을 받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한 이유다.
현지 언론은 텍사스에 최근 데이터센터가 우후죽순 들어서며 물 수요가 더욱 늘어난 탓도 있다고 설명한다. “일부 지역은 물 비상사태 직전”(포브스)이라고 한다. 지난 2월 멕시코 측이 물을 공급하겠다고 미국 측을 달랬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으리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 AFP=연합뉴스
국제 공조 절실...한국도 예외 아냐
국가 간 갈등은 늘고 있지만 국제 공조는 미흡하다. 유럽연합(EU)이 데이터센터의 물·에너지 사용 보고를 의무화하는 등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유럽 지역에만 국한돼 있다. 특히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지난 1월 유엔 기후변화협약(UNFCCC) 등 각종 국제기구에서 탈퇴하며 수자원 관련 국제 규범을 이끌어내긴 더욱 힘들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도 남의 일이 아니다. 연간 강수량은 세계 평균의 1.3배지만 여름철에 강우가 집중된 데다 인구 밀도가 높아 1인당 연간 가용 수자원량(1450㎥)은 세계 120위권 수준이다. 반도체·배터리 등 물 집약 산업의 비중도 크다. 시장조사기관 모도인텔리전스는 국내 데이터센터의 올해 물 사용량 예상치는 860억리터로, 2031년에는 2배로 늘어날 것이라 전망한다. 당장 감당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지만, 특정 지역에 관련 시설이 집중될 시 문제가 될 수 있다.
한무영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명예교수는 “강우량 자체는 적지 않지만 들쑥날쑥하다는 점이 문제”라며 “데이터센터 등 물 사용량은 늘고 있어,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정책적으로 빗물을 활용하는 등 물 부족을 해결할 여러 방안을 고심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