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과거를 존중하는 한국, 문화를 파괴하는 중국 [왕겅우 회고록-청년기(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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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에 상황의 초점이 북쪽으로 옮겨진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이라는 대폭발과 직접 간접으로 관계된 세 차례 회의에 초청받은 위에 말라야대학을 떠나 중국의 역사와 정치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곳으로 옮겨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첫 초청은 1966년 2월 시카고대학의 “위기의 중국” 학술회의였다. “위기”라 함은 지난 반세기 동안 두 차례 격렬한 혁명을 겪은 중국이 또 한 차례 혁명의 현장이 되었다는 말이다.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놓고 지난 1년간 시카고대학에서 진행해 온 일련의 세미나와 회의를 총결하는 자리였다. 중국의 유산을 철저히 검토해 두 번째 혁명이 “자기 새끼들을 잡아먹는” 것처럼 보이기에 이른 까닭을 따져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두 번째 초청은 앤아버의 동양학대회였다. 그곳에서도 대회의 중국 부문은 같은 주제로 뒤덮일 기세였다. 원래 근대 이전의 동양을 탐구하는 대회였으나 중국학 연구자들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관심을 피할 수 없었다. 내게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해 말 한국에 초청되었을 때는 중국의 혁명이 유교문명의 본질적 가치를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이냐는 질문을 거듭거듭 받았다.
세 차례 회의에 연거푸 참석하면서 나 스스로 선택한 연구분야의 뛰어난 성과들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학문적 업적을 이룰 영역의 연구로 돌아갈 필요가 분명해지고 있었다. 학자로서 삶을 위해 절실한 문제였다.
중국사의 맥락에서 혁명의 목적은 중국을 통일해 외부의 존중과 내부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혁명(革命)”이란 말에는 여러 겹 의미가 겹쳐져 있었고, 최근에 씌워진 의미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사례로부터 번역된 것이었다. 말라야연방, 그리고 말레이시아에 대해 가장 가까운 위협은 인도네시아의 경험이었다.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공산당이 그토록 큰 힘을 가지게 된 원인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수카르노가 그토록 쉽게 제거되고 공산당이 그토록 철저하게 파괴된 원인은 또 어디 있는가?
시카고회의에서는 역사-전통 부문의 논평진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19-20세기의 유-법가 왕조와 진행 중인 마오쩌둥주의 투쟁 사이의 관련성을 검토하기 위해 서방 역사학자 몇 사람이 초청되었다. 호핑티가 중국 정치 전통의 관련되는 측면들을 논한 강연으로 시작한 뒤 류쾅칭이 19세기를 다루고 마틴 윌버가 20세기를 다룬 두 편의 역사 분석 발표가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권력구조의 특성을 확인하는 그 접근방법에 탄복했다. 뒤이어 벤저민 슈워츠, 쩌우탕, 차머스 존슨, 세 사람의 발표에서는 1966년 초 이래 나타난 사고방식과 지도력과 집단행동 양식이 과거의 현상에 비추어 설명되었다.
시카고회의에서 특별한 점은 6편 발표의 토론에 깊이를 더해준 14명 논평진의 역할이었다. 나는 윌버의 발표에 붙여서 과거의 시대구분과 재통일의 성공에 필요한 조건을 비교하는 이야기를 했다. 이 회의를 통해 역사학자의 역할이 현재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어쩌면 그것이 역사학자의 의무일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기운이 났다.
회의 후반부까지 계속 참석해서 다른 20명 사회과학자들의 발표와 토론을 들었다. 팸플릿과 인터뷰 자료를 홍콩, 타이완과 일본을 통해 입수하는 일, 그리고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기술이 필요한가 논의가 있었다. 물론 내가 본 것은 일군의 중국통(China-watcher)들이 일하는 방식으로 석연치 않은 점이 많은 방식이었지만, 더 많은 것을 알아내고 싶은 욕구를 일으켜준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봉건적 과거와 관계된 일체를 배격한다는 혁명가들이 지금의 내부투쟁을 위해 과거를 이용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식으로 역사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이 뒤얽히는 모습을 본 경험이 이후의 내 작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후에 깨달았다.
몇 달 후 앤아버의 동양학대회에는 평소와 달리 사회과학자들이 많이 참석했다. 가장 많은 참가자가 몰린 자리는 한 즉석토론회였는데, 거기서 나는 존 페어뱅크와 유럽 학자들과 함께 중국의 최근 혁명에서 무엇이 “문화”인지 토론했다. 많은 중국학 연구자들이 흥분하는 바람에 문화보다 정치를 토론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타이완 국민당에서 온 한 노학자는 동남아시아 “화교”가 전통을 등진 것을 비난했다. 단상에 있던 나를 그 사례로 지목했다. “중국인” 아닌 말라야 “화인(華人)”으로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정체성 정치의 핵심에 있는 초국가적 가변성을 더 깊이 연구할 필요를 이 토론을 통해 느끼게 되었다.
앞서 동남아시아 각국이 각자의 문제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고 얘기한 일이 있다. 실제로 식민통치자들에게 물려받은 국경선과 그 국경선 안에 뒤섞여 사는 여러 종족집단 사이의 관계를 관리하는 것만도 대부분 국가에서 벅찬 일이었다. 그래서 지역 전체의 특성과 가능성을 넓게 생각할 여유가 별로 없었다. 미국, 서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의 학자와 정치인들이 이 지역을 전체적으로 더 잘 살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1960년대 중엽까지 일본은 전후 회복에 성공해서 지역의 새 지도자들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 홍콩, 타이완과 한국, 아시아의 호랑이들이 일본의 수출주도 전략을 따라갔고, 독립한 싱가포르도 곧 대열에 합류했다. 일본 학술잡지에 나타나는 전후 일본의 학문활동은 대단한 수준이고, 특히 교토대학의 동남아시아 연구센터에서 나오는 업적이 뛰어났다.
나는 일본이나 서양에서만이 아니라 홍콩, 싱가포르, 쿠알라룸푸르(KL)와 방콕의 국제회의에서도 일본 학자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수집한 문화혁명 관계 문서가 홍콩에서 수집한 것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카고회의에서도 중국통들이 일본 자료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동아시아에서 펼쳐지고 있던 새로운 상황이 학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한 달 지내라는 초청이 왔을 때 반갑게 받아들였다. 최규하 주 말레이시아 한국대사가 꾸며준 일이었다. 최 씨는 영문학을 공부한 고위 외교관으로 한-중 관계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내가 자기 친구 전해종과 나란히 페어뱅크의 〈중국의 세계질서 The Chinese World Order〉에 글을 올린 사실을 알고 한국과 중국의 유가 전통 비교를 위해 나를 초청하도록 교육부를 설득했다. 나는 10세기 이후 중-베트남 관계사를 공부한 배경 위에서 한-중 관계에 관심이 있었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설명한 전해종의 논문이 내 관심을 키워주었고, 서울대 규장각 장서를 열람할 기회를 마다할 수 없었다.
이 한국 방문이 내게 운명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밝힌다. 한국에서 견문을 통해 중국 연구에 집중하고자 하는 내 소망을 확인하고 중국 관계 자료를 가장 제한 없이 볼 수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대에서 전해종 교수가 보여준 대학 소장 도서 중에 〈조선왕조실록〉도 있었다. 청나라 때의 관용어로 적힌 내용 일부를 훑어보며 일본의 야욕에 대한 자랑스러운 저항의 기록에 감명받았다. 전해종은 동료 두 명을 소개해 주었는데, 조선시대 한국 유가의 전문가 고병익과 백제 왕도를 발굴한 고고학자 김원룡이었다. 두 사람 모두 한국문화의 오래된 뿌리를 강조하고 반도의 여러 지역과 중국의 팽창 압력 사이의 관계를 설명했다. 그밖에 만난 지도적 역사학자 두 사람은 서강대의 이기백과 고려대의 김준엽이었다.
이기백은 고려시대(xxx-xxxx) 연구자였다. 그의 10세기 고려 건국 연구에는 내 연구와 맞물리는 지점이 있었다. 그는 고려가 요나라 침략을 물리치는 대목을 연구했는데, 나는 북중국 오대(五代) 왕조들이 거란을 막아내지 못한 사실을 살펴보았다. 같은 적을 가진 고려와 송나라는 상호존중의 관계를 맺었다. 이 교수는 〈고려사〉를 보여주며 신라왕국 멸망 후 후삼국의 병립과 반도의 완전한 재통일을 끌어낸 요인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했다.
아세아문제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낸 김준엽은 특이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다. 학병으로 중국에 끌려갔다가 충칭으로 탈출해 장제스 정부의 지원을 받는 한국 민족주의자들과 합류했다. 그곳 국립중앙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948년에 귀국했다. 따져보니 내 신입생 때와 몇 달 겹치는 시간이 있었다. 마침 그의 연구소에서 동남아시아 부문을 시작하고 있었다. 김준엽은 인도네시아어 강좌를 준비하고 있었고 말레이시아에 관심이 많았다. 그와는 친구가 되어 세기말까지 연락을 주고받았다.
전해종은 제자인 대학원생 권석봉에게 내 지방 방문 안내를 부탁했다. 조선의 위대한 유학자 이황(李滉)의 고향 안동으로 시작해 발굴이 막 끝난 백제 고도로 갔다. 왕릉에서 당나라 시대 중국 영향을 느낄 수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다음에는 반도를 가로질러 신라 왕도 경주로 가서 불국사 유적을 보았다. 신라 불교의 어디까지 중국에서 걸러진 상태로 들어온 것이고 어디까지 인도에서 직접 가르침을 얻은 신라 승려들이 남긴 것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그 유적은 10세기 이전 중국의 것과 분명히 달라 보였다.
농촌지대를 달려 대구를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경작 가능한 땅은 빈틈없이 경작되는 것을 보아 인구가 조밀함을 알 수 있었다. 서울에 가까워지며 경치가 확연히 달라졌다. 끝없이 늘어선 공장 굴뚝을 통해 산업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아시아의 호랑이가 일본을 따라잡고 현대세계에 동참하려는 의지를 볼 수 있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중국의 문화혁명에 관한 뉴스가 매일 들어왔다. 반공 성향의 해설에는 아무 흥미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중국의 문화 파괴 현상과 한국에서 아직도 과거를 존중하는 분위기 사이의 대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깊은 슬픔을 느꼈다. 중국사 깊은 곳의 무언가와 관계가 있을 텐데,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새삼 절실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이 기이한 사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무엇이 중국의 과거에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며칠 밤 되새긴 끝에 마거릿에게 전화해서 내 심정을 알렸다.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ANU)의 연구교수 초청을 받아들일 마음이 되었다고 말했다.
Take a Break / 이제 다른 길로
말라야대학을 떠나 중국사 연구로 돌아갈 기회를 주는 초청이 세 곳에서 왔다. 마침 내가 중국사 연구를 접어두고 말라야대학 우리 학과의 사명이라 할 “말라야 국사” 구성에 전념하는 길에 의문을 떠올리고 있는 참에 세 곳 초청이 쏟아져 들어왔다. 응하고 싶은 마음도 컸으나 국외에 나가 2-3년 이상 지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초청을 놓고 마거릿과 함께 궁리해보았다. 첫 초청은 컬럼비아대학의 캐링턴 굿리치가 동아시아언어문화학과로 와달라는 것이었다. 앤아버에서 만났을 때 굿리치는 명나라 시대 연구의 확장에 제일 생각이 많고 (매우 중요한 〈명대인물사전〉 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송 시대 연구의 확장도 생각하고 있었다. 곧이어 두 번째 초청이 들어왔다. 소아스(SOAS)의 C.H. 필립스 학장으로부터 현대중국센터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며칠 후 ANU의 태평양연구원장 잭 크로퍼드로부터 곧 은퇴할 C,P. 피처럴드의 뒤를 이어 극동사 교수직을 맡아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세 자리 모두 중국사 연구자로서 내 역할을 기대한다는 점에 마음이 끌렸다. 말레이시아 역사를 의무감으로 붙잡고 있으면서도 그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내지 못하고 있던 사정을 돌아볼 계기였다. 세 곳 다 중국사 연구에 좋은 여건이었다.
말라야대학에서 무급휴직을 얻어 어디든 가서 3년쯤 지내면 어떨까 생각했다. 새집에 이사한 지도 얼마 안 되고, 학교 다니는 아이들을 두고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마거릿과 나는 세 곳에서 주어질 여건을 토론하면서 응답을 미루고 있었다. 마거릿에게는 뉴욕에서 아이들 키우는 것이 내키지 않았고, 영국에서 겪은 현대식 중학교의 괴로운 경험 때문에 런던에도 자신이 없었다. 캔버라가 그중 가까운 곳이어서 가족과 왕래도 쉬울 것이었다. 콜럼비아와 소아스가 권위가 더 높은 기관이었고 뉴욕과 런던이 더 재미있는 도시들이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ANU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조건에 가장 합당한 곳이었다.
그래서 ANU로 일단 방향을 정해놓고 한국에 다녀온 후 최종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몇 주일 지내다 보니 내가 평생을 바칠 분야가 중국 역사라는 확신이 그 여행을 통해 굳어졌다는 말을 마거릿에게 얼른 하고 싶어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전화부터 했다.
3년간 무급휴직을 요청하는 편지를 대학평의회로 보냈다. ANU에서 강의 부담 없이 연구에 집중하고 싶어서 초청에 응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장직을 넘겨받을 새 교수의 임명에 평의회가 동의해 준다면 나는 돌아와서 제2교수를 맡겠다고 했다. 그런데 한 학과에 두 명의 교수를 두는 것은 학교 정책에 어긋나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다는 대답을 받았다. 내가 없는 동안 강사가 학과장 서리를 맡게 한다는 것이었다. 서리를 3년간 두는 것은 학과를 위해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사직하면 대학에서 교수직을 채울 테니 학과를 위해 더 좋은 길이었다. 나 자신은 3년 후 돌아오고 싶으면 그때 알아볼 일이었다. 그런 이유를 평의회에 설명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떠난다는 데 대한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고, 그로 인해 평소에 하지 않던 짓을 하게 되었다. 탄치쿤과의 우정에 관계된 일이었다. 그는 대학 평의원으로서 나를 많이 도와주었다. 탄치쿤이 게라칸당(Parti Gerakan Rakyat Malaysia)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내 도움을 부탁했다. 그는 특정 종족집단의 지지에 의지하지 않고 모든 취약계층을 옹호하는 정당을 만들 생각을 하고 내 도움을 청했다. 성명서와 헌장의 작성을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이것을 캔버라로 떠나기 전에 말레이시아에 대한 소속감을 표출할 기회로 받아들였다. 친구 겸 고문 입장으로 몇 차례 회의에 참석했고 1968년의 창립대회에 초대받은 나는 헌장 작성의 공로자로 소개되었다. 이튿날 신문에는 내가 당 창립자의 한 사람으로 보도되었다.
말레이시아 정치에서 종족 정체성에 기반을 둔 정당들이 정권을 분점해 왔는데, 게라칸당은 이 풍조를 거부한 대표적 정당이었다. 그러나 1972년 게라칸당이 종족 정당들의 연합정권에 참여하자 탄치쿤(陳志勤, xxxx-xxxx)은 탈당해 탈-종족 노선을 외롭게 지켰고, “미스터 어퍼지션(Mr. Opposition)”이란 별명을 얻었다.
이 일을 여기 적는 것은 내가 말레이시아 정당정치에 미미한 역할이라도 공개적으로 맡은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 필요한 “집”의 포용적 의미를 공유하려는 뜻에 게라칸 참여는 얇은 층위나마 하나를 더하는 것이었다. 국가와 동포, 도시와 주, 학교의 동료와 학생들, 가족과 친구들, 집과 정원, 그리고 내 마음속의 여러 겹 정체성이 모두 “집”의 포용적 의미를 구성하는 요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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