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회사선 참다가 집에서 폭발" 번아웃보다 위험한 '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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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트아웃 SNS 게시글. 사진 X 캡처

서울의 한 중소기업에서 ‘프로 일잘러(일을 잘하는 사람)’로 통하던 A씨(30대)는 7년 차를 맞은 올해 주요 부서로 발령받았다. 지난해엔 원하던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도 땄다. 승승장구하던 그가 몇 달 전부터 무기력함과 신경통 등 건강 이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일과중엔 맡은 업무를 어떻게든 해냈지만, 즐겁던 일이 지루해지고 출근과 동시에 퇴근을 기다리며 버티는 날들이 반복됐다. A씨는 “회사에선 잘 참고 일하다가 퇴근한 뒤 가족들에게 사소한 일로 짜증을 내는 일이 잦아졌다”며 “기억력도 떨어져 어느 날엔 분리수거를 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까지 버려 스스로 놀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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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 기자

직장 생활 중 겉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지만 피로감·무기력함에 빠진 상태인 ‘토스트아웃’(Toastout) 증상을 호소하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 토스트아웃은 극도의 신체적·정신적 피로 상태에 빠져 모든 에너지가 방전된 ‘번아웃’(Burnout·탈진증후군)의 전조 증상으로, 감정적 탈진 상태라고도 불린다.

빵이 까맣게 타기 직전 속까지 노릇하게 구워진 상태에 비유한 신조어다. 주어진 일은 그럭저럭 완수해 동료와 선·후배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스스로 무기력증이나 의욕 상실에 빠진 직장인에게 통용한다. 번아웃은 지난 2019년 세계보건기구(WHO)가 증후군 중 하나로 정식 분류하면서 스웨덴 등 일부 유럽 국가에선 유급 병가를 허용하는 질병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토스트아웃은 아직 의학적 증상이나 정신적 질환으로 분류되진 않는다.

MZ 세대 젊은 직장인 사이에선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이런 증상을 호소하는 토스트아웃 밈(meme·화제가 된 인터넷 콘텐트)도 유행한다. 갈색빛으로 구워진 토스트 사진과 함께 “요즘 토스트아웃 상태이지만 내일 불금 생각하며 견딘다”고 글을 쓰는 식이다. 햄 토스트(짠내 나는 하루를 보내 디톡스가 필요한 경우), 양상추 토스트(체력이 떨어져 흐물흐물해진 상태), 버터 토스트(졸려서 녹아내릴 것 같아 낮잠이 필요할 때) 등 다양한 변형 밈도 등장했다. 뇌에 과부하가 걸려 일시적으로 번아웃됐다는 뜻의 ‘공갈빵아웃(밤샘 업무나 학업에 몰두해도 이튿날이면 다 잊어버리는 상태)’ 같은 말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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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 이미지. 사진 게티이미지

젊은층 사이에서 정식 의료용어가 아닌데도 토스트아웃이 유행하는 데엔 완전히 탈진하기 전 본인의 상태를 세분화해 진단하고 자신을 보살피려는 특성이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박혜연 동덕여대 교양학과 교수는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스스로 지친 상태를 살피면서 좀 더 자세한 표현을 이용해 타인과 소통하는 모습”이라고 분석했다.

또 사실상 완전 탈진 상태에 이르렀지만, 성취에 대한 높은 기준 때문에 스스로의 상태를 자각하지 못한 경우도 많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했다. 박 교수는 “토스트아웃도 결국 번아웃의 일종”이라며 “스스로에 대한 너무 높은 기준이 ‘번아웃을 겪을만한 고통은 겪지 않았다’는 자기 회피로 이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번아웃이라고 하면 무능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비칠 수 있다는 생각에 그 전 단계인 토스트아웃으로 표현하려는 심리”라며 “번아웃보다 더 위험한 상태라고도 볼 수 있고, 실제로 자각한 뒤에 후폭풍이 큰 경우도 많다”고 했다.

2022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만 19~34세 청년이 속한 약 1만 5000 가구를 대상으로 한 ‘청년 삶 실태조사’에 따르면, 번아웃을 겪었다고 응답한 청년은 33.9%에 달했다. 일상생활 속 ‘반복된 스트레스와 지루함의 연속’ 등이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임 교수는 “여러 논문에서 감정적으로 소진된 상태가 신체적 질병을 일으킬 확률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일부 젊은이들은 되려 규칙적인 운동·독서·공부·여행 등에 몰두해 ‘갓생(신 같은 존재처럼 계획적이고, 생산적으로 사는 삶)’으로 토스트아웃을 극복한 경험을 SNS에 공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스스로 무기력하고 흥미를 잃은 상태에 빠졌다고 생각되면 일단 충분한 휴식을 취할 환경을 확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 교수는 “현대 사회 속 능력·성과주의에 지친 젊은이들이 번아웃과 토스트아웃에 쉽게 빠진다”며 “그럼에도 뭔가 더 해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이를 다른 생산적인 활동으로 주의를 돌려 극복하려다가 거기서도 성과가 쉽게 나지 않을 경우 더 큰 스트레스가 초래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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