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31년만에 불러낸 필름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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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미제로 남을 뻔한 영화배우 실종사건의 진상이 22년 만에 드러난다.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6일 개봉)는 스페인 거장 빅토르 에리세(84) 감독의 31년 만의 장편 복귀작. 노년의 영화감독 미겔(마놀로 솔로)이 TV 탐사 프로그램의 출연 의뢰를 계기로 22년 전 영화 촬영 도중 행방불명된 주연 배우이자 친구 훌리오(호세 코로나도)를 찾아 나선다. 훌리오의 증발로 영화 제작은 중단됐고, 미겔의 연출 경력도 끝장났다. 제보로 찾아간 곳에서 미겔은 뜻밖의 과거와 마주한다.
영사기가 돌아가는 시골 단관극장, 유폐됐던 필름. 사라져가는 ‘시네마’ 시대를 의인화한 듯한 영화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서 온 미공개 영화인 양, 고전 미학에 충실하지만 미스터리 추적극의 긴장감이 긴 상영 시간(169분)을 우직하게 지탱한다. “필름의 마법에 바치는 잔잔하고도 충격적인 헌사”(인디와이어), “영매술에 참석하는 듯한 황홀경을 선사한다”(뉴요커) 등 호평이 잇따랐다.
영화와 닮은 에리세 감독의 삶도 흥미를 더한다. 마드리드대에서 정치·경제·법학을 공부한 그는 지난 50년간 장편 4편만 내놨다. 데뷔작 ‘벌집의 정령’(1973)은 고전 영화 ‘프랑켄슈타인’에 매혹된 5살 소녀(아나 토렌트) 눈에 비친 프랑코 독재정권의 만행을 우화적으로 그린 작품. 산세바스티안 영화제 최고 작품상을 받았다. 자금 부족으로 미완성인데도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남쪽’(1983),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국제비평가연맹상 수상작인 다큐멘터리 ‘햇빛 속의 모과나무’(1992) 등 발표작마다 걸작 반열에 올랐다.
‘남쪽’ 미완성 경험이 실마리가 된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과거 영화의 유령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현대판 고전이다. 초로의 미겔은 백발이 된 편집자와 필름 영화 황금기를 회상하고, 바닷가 은신처의 이웃들과 서부극 ‘리오 브라보’(1959) 주제가를 열창한다. ‘벌집의 정령’의 아역 토렌트가 훌리오의 중년 딸 역할로 에리세 감독과 50년 만에 뭉쳤다. 올해 스페인 최고 권위의 영화상인 고야상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은 훌리오 역의 호세 코로나도 등 배우들 연기도 탄탄하다.
정체성과 같은 기억을 잃어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존재일까. 영화는 모든 등장인물이 쇠락한 영화관에 모여 ‘필름의 마법’을 경험하는 엔딩에서 초월적 답변을 들려준다. “기억은 매우 중요하지만, 한 존재는 단순한 기억 이상이다.” 흘러간 고전 영화 시절을 그리워하는 대신 이를 계승한 생생한 신작을 스크린에 새겨낸 에리세 감독 스스로가 어쩌면 이 영화의 주제일지도 모른다.
디지털로 촬영했지만, 촬영본을 컴퓨터로 매만지는 후보정 작업은 거의 하지 않았다. 영화 속 영화 ‘작별의 눈빛’은 필름으로 촬영했다. 올 초 미국 매체 리틀 화이트 라이즈와의 인터뷰에서 에리세 감독은 “디지털로 인해 우리는 이미지를 포착하는 게 아니라 이미지를 제조하고 있다. 이는 모든 아티스트에게 끔찍한 손실”이라며 “내 관점을 고수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스릴러 장르 관습이라는 전략을 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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